본문 바로가기
리뷰

영화 조커 후기: 폭력의 정당화?

by Boribori:3 2019. 10. 9.

친구가 하도 극찬을 하길래 보게 된 영화-

조커가 나온다는 다크나이트 등 배트맨시리즈?는 단 한편도 본 적이 없었기에 전편들을 보고 봐야하지 않나,, 싶었지만

그냥 이 영화만 봐도 괜찮다는 말에 보러가게 되었다. 거의 그랬듯이 예고편도 보지 않고.

아. 조커가 어떤 캐릭터인지는 할라퀸 나오는 수어사이드 수쿼드라는 영화를 통해 대충은 알고 있었다.

또라이 미치광이 악당.

수어사이드 스쿼드에서 할리퀸과 조커

(할리퀸 영화는 전에 인도 갔을 땐가? 한국에선 안 뜨는 인기 영화가 넷플릭스에 뜨길래 봤었다. 넷플은 나라마다 다른 영화가 뜨나보다.)

그래서 마블 히어로물 같은 액션 블록버스터, 이런 화려한 영화 or 조커가 악마 캐릭터인 만큼 스릴러?같은 걸 기대했었는데(정말 뭣도 모르고 보러갔다.) 이 영화는 이 모든 장르에 포함되지 않았고 상업영화 특유의 '재미'도 없었다.

대신 조커라는 희대의 악마같은 인물이 어떻게 탄생하게 되었는지 보여주는 시사하는 바가 많은 무겁고 비극적인 영화였다. 그런데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극장 문을 나서면서 , 아니 후기를 쓰고있는 지금까지도 영화를 보며 느꼈던 전율과 여운이 남아 가시질 않는다. 얼마 안 되는 손에 꼽는 명작, 인생영화 !!

어떤 장면이 망상이고 아니고는 ,, 영화를 한번 더 보고 생각해봐야겠다.

이 영화 속 장면들의 망상 여부는 사실 그리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내게 중요한 건 영화가 던지는 메시지.

.

.

 

광대분장을 하고 광고판을 들고 홍보하는 아서

조커가 되기 전 그의 이름은 아서 플렉. 그는 사람들을 웃기는 코미디언을 꿈꿨던 인기없는, 당장 먹고살기도 빠듯한 무명의 광대였다. 웃음 발작을 일으키는 병이 있어 그런지, 직장에서도 외톨이. 그는 열심히 살았고, 꿈이 있는 사람이지만 안타깝게도 그의 뜻대로 되는 일은 하나도 없었다.

다른 가족 없이 홀로 가난의 냄새가 풍기는 낡은 집에서 늙은 어머니를 모시고 살아가는 아들이자, 심지어 10대 청소년들도 무시하는 왜소한 체구의- 우울증 약을 복용하는 남자.

10대 청소년들에게 폭행당하고 쓰러진 아서

그런데 아서 뿐만이 아니었다. 아서처럼 불우한 환경에서 살아야 했던 사람들은 아주 많았다.

아서 플렉

영화 속 배경은 1980년대, 사회 양극화가 극심했던 미국의 한 도시였다. 잘 사는 사람은 대대로 잘살고, 가진 것 없는 사람들은 대대로 못사는. 복지마저, 사회보장제도마저 불투명한 그런 시대. 환경미화원조차 파업을 하여 거리엔 쓰레기 봉투가 산처럼 쌓이고 커다란 쥐들이 들끓는다. 물론 고통받는 이들은 가진 것 없는 아서 같은 가난한 사람들 뿐. 부자들은 늘 그렇듯, 깨끗한 거리와 집에서 여전히 잘 먹고 산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빈부격차는 늘 있었던 일. 차별과 불평등한 세상, 노력해도 안 되기에- 계속 이렇게 살아야한다는 미래가 없어보이는 좌절감이 사람을 잠식시킨다. 그러나 부자들은 별다른 노력 없이도 잘 먹고 잘 산다. 지금 우리 세상에서도 이는 마찬가지. 아서의 감정선에 몰입하며 따라갈 수 있었던 이유도 , 영화가 사회를 너무 현실적으로 그렸기 때문이 아닐까. 이렇게 광적인 살인마 조커가 되기 전의 아서 플렉이 성실하고 착한 젊은이였다는 점이 영화가 그린, '사회가 만들어낸 조커'라는 이야기에 설득당하게 만든다. 우리 역시 마음 속은 짜증과 분노로 가득해도 사회생활을 위해선 얼굴은 웃고있어야 할 때가 많으니까.

아서가 계단을 힘없게 오르는 장면.

.

.

아서 플렉은, 모두가 자신을 무시하는 환경 속에서 좌절하고 또 좌절한다. 그리고 내면에 쌓이고 쌓인 그 감정은 폭발한다.

그가 처음으로 살인을 저지른 장소는 지하철이었다.

인적이 뜸한 지하철 안에 혼자 앉아있는 여자를 희롱하는 세명의 양복입은 건장한 남자들. 그런데 그때 또 멈추기 힘든, 병적인 웃음이 터진다. 남자 셋은 광대 복장을 하고 혼자있는 왜소한 아서를 그냥 놔둘리 없고 그에게 다가가 조롱하고 폭력을 휘두른다. 여태 그러한 멸시와 괴롭힘을 그저 당하고, 견디기만 했던 아서는 - 자신을 지키기위해 가지고다니던 총으로 세 사람 모두를 쏴 죽인다. 처음으로 자신을 괴롭히던 상대를 응징한 것.

첫 살인을 저지른 아서는 살인현장에서 벗어나 화장실로 들어가 거울을 보다 뭔가에 홀린 사람인듯 춤을 추는데,,

그의 얼굴과 몸짓에서 처음으로 해방감이 보였다.

.

.

'Gotham’s lost its way. What kind of coward would do something that coldblooded? Someone who hides behind a mask.'

아서가 지하철에서 죽여버린 사람 3명은 알고보니 토마스 웨인(배트맨의 아버지라고 한다.)이 CEO로 있는 잘나가는 금융회사 직원들이었다. 토마스 웨인은 뉴스에 나와 , 아서의 행동을 조롱하고 폄훼한다. 가난하고 게으른 겁쟁이의 비겁한 공격이라는 식으로. 

그런데 뉴스가 전파를 타고 나가자, 놀랍게도 아서는 하층민들의 영웅이 된다. 아무리 노력해도 돌아오는 건 무관심 혹은 조롱뿐이었던 아서의 인생에- 살인 이후 처음으로 받아보는 대중들의 관심과 환호는 아서를 기쁘게 한다.

'In my whole life, I didn’t know if I even really existed. But I do. And people are starting to notice. '

 

.

.

 

#PUT ON A HAPPY FACE

늙은 어머니를 혼자 모시고 사는 아서. 어머니는 그를 'HAPPY'라고 불렀다. 항상 웃으며 살라고.

'My mother always tells me to smile and put on a happy face. She told me I had a purpose to bring laughter and joy to the world.'

그러나 아서는 사실, 행복한 적이 없었다. 원하지 않을 때, 특히 긴장하거나 당황할 때 터지는 웃음발작은 그에게 웃는 것조차 스트레스로 느껴지게 만든다.

웃기는데 재능이 없기도 하고, 재미도 없는데 혼자 그렇게 연신 웃어대니 -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는 아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 남들을 웃기기 위해 늘 웃는 연습을 한다. 웃는 모습의 우스꽝스러운 광대 분장을 하고.

우울증과 병적인 웃음발작 질환을 앓고 있는 아서는 국가에서 지원하는 상담을 주기적으로 받곤 하는데,

그때 아서는 이런 말을 한다.

정신질환자로서 가장 힘든 건 내가 아닌 다른사람인 척을 해야하는 것이라고.

어머니 페니 역시 자신을 오래전에 떠나버리고, 한번도 찾지 않은 토마스에겐 사랑한다는 말이 담긴 편지를 매일 보내면서, 아들에겐 그런 말을 한번도 하지 않는다. (적어도 영화 속에선) 자신을 돌보고 목욕까지 시켜주는 착한 아서를 당연하게 생각하고 고마움과 미안함은 없어보인다.

그는 코미디언이 되기 위해 노력하는 아들에게 단호하게 한마디 한다.

'코미디언은 웃겨야 하지. 넌 웃기지 않잖아.'

물론, 재능이 전혀 없는 자식이나 친구가 먼 산을 바라보고 있는 것 같으면 조언자로서 사실을 말해줄 순 있지만 표현 방식이 중요하다 생각한다. 특히 우울증과 정신질환으로 약을 먹고 있는 사람에게는.

아서는 그렇게,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조차 사랑, 인정받지 못하는 존재였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코미디언이 되어 무대위에 서서 남을 웃기는 꿈을 이루는 게 그의 인생 유일한 희망이었고, 머레이라는 유명 코미디언의 쇼를 보며 늘 그 꿈을 되새기지만. 머레이조차 자신을 비웃고 남들 앞에 웃음거리로 내세웠다.

아서가 한때 존경했던 머레이

(머레이는 자신의 쇼에 아서의 영상을 내보낸다. 웃기기 위해 무대에 섰으면서 아무도 웃기지 못하고 자신만 웃음발작을 일으키는 아서의 영상,을 내보내며 그를 'JOKER'라고 언급한다. 하나도 웃기지 않는 농담꾼이라는 조롱의 의미로. 한번 웃고 넘어갈 소재로 아서를 써먹었을 뿐인 머레이는 어차피 자기가 했던 말도 기억하지 못하지만 이후 머레이의 쇼에 게스트로 초대된 아서는 자신을 조커라고 불러달라 한다.)

머레이 쇼에 게스트로 초대받은 아서는 , 집에서 연습했던 것처럼 자살을 하려했다. (-던 것처럼 보였다, 내가 느끼기엔.)

그런데 머레이의 계속되는 조롱으로 조커는 살인을 결심한다. 생방송 도중, 머레이 머리에 총을 쏴 죽여버린다. 살인을 저지르고도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오히려 신이 나듯이 카메라 앞에서 보란듯이 춤을 추는 아서, 아니 조커. 그는 - '조커'가 되어버렸다. 조커가 된 아서는 더 이상 원치않는 고통스러운 웃음발작을 일으키지 않는다.

힘겹게 올라갔던 영화 첫장면과 대치되는, 춤을 추며 내려오는 장면.

코미디는 주관적인데, 모두가 웃기고 안 웃긴 걸 판단한다는 아서의 대사가 떠올랐다.

이전에 그는 유명한 코미디 쇼나 펍, 클럽 등 스탠딩 쇼에 다니며 보고 들은 사람들이 재밌어하는 내용들을 노트에 메모해놓고, 웃기려고 노력하나 실패했다. 웃어줬다고 생각한 소피도 알고보니 다 그의 망상이었다. 사랑했던 어머니도 알고보니 어렸을 적 학대당하는 자신을 방치했었고, 그 때문에 자신의 장애가 생겼다는 것도 알게되고.

 

그렇게 자신의 인생이 코미디였다는 걸 깨달은 조커는 자신의 비극적인 코미디같은 삶 안에 사람들을 끌어들인다.

머레이를 죽인 아서는 곧바로 체포되고, 경찰차로 호송된다.  도중 길거리엔 격분한 시민들의 모습이 보인다. 생방송으로 유명인 머레이가 총살 당하는 것을 보고 환호하는 시민들. 질서가 사라진 도심 속에서 아서가 타던 차가 부딪히는 교통사고가 나고, 시민들은 의식을 잃은 아서를 구출한다. 경찰은 그대로 두고. 깨어나보니, 자신을 보며 미친듯이 환호하는 시민들이 보인다.

더 이상 참지 않고 자신을 멸시하던 사람을 죽이니, 오히려 그도록 원하던- 사람들의 환호와 웃음, 박수갈채를 받았던 것.

이때 아서는 전율을 느끼며, 또 춤을 춘다.

올해 인상깊게 본 영화, 기생충이 많이 떠올랐다. 나만 잘 살면 돼 마인드와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무시, 방관하고만 살지 말자는 교훈을 주는.

 

.

.

이 영화가 논란이 되는 이유는 폭력과 살인을 정당화하여 사회에 악영향을 끼칠 수 있다는 것.

물론 살인은 어떠한 이유로도 정당화될 수 없다. 나를 죽이려는 상대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정당방위가 아닌 이상. 개인적인 이유로 자신을 무시한다는 이유만으로 사람을 죽였던 조커의 행동은 물론 절대 용서받지 못할 짓이며 영웅으로 추앙받아서도 안 된는 끔찍한 짓이다. 조커는 피해자에서 가해자가 되었을 뿐. 또다른 피해자들을 만들어 낸, 자신에게 상처를 준 엄마와 머레이와 전혀 다를 바 없는.

 

그런데 내게 조커는,  '폭력의 정당화'가 아니라, 사회적 약자인 아서를 보호해주지 않는 국가와 약자들을 무시하는 가진자들, 주변인들에게 무거운 메시지를 주는 영화였다. 무시와 차별을 받은 한 인간이 어떻게 변할 수 있는지를.

무관심의 무서움. 단 한명이라도, 아서의 곁에 남아 그의 이야기에 귀기울여주고 응원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아서가 조커가 됐을까?

아무런 희망이 없는 극단적인 상황에서, 범죄를 저지르려는 사람에게 법은 무슨 의미일 수 있을까.

미쳐버린 사회에서 미쳐버린 사람보고 미쳤다고 한들 무슨 소용일까.

내가 아서와 같은 상황에 있었다면 어떻게 살았을까. 분노하지 않고 살 수 있을까, 라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들었다.

나 혼자 잘먹고 잘 살아선 안 된다,라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영화.

대사 하나하나가, 한 장면 한 장면이 전부 의미가 있었고 생각할 거리를 많이 던져주는, 오랜만에 제대로 된 멋진 영화였다. 이래서 n회차 관람객들이 생기는구나!

 

그리고 이 영화를 통해 처음 알게 된 조커를 연기했던 호아킨 피닉스라는 배우.

그의 미친 연기에 팬이 되었다. 조커에만 초점이 맞춰진 주인공이 조커 혼자인 1인극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런 영화에선 배우의 연기력이 무엇보다 중요한데, 그의 연기는 정말 기가..막힌다. 덕분에 영화내내 빠져서, 홀려서, 몰입해서 볼 수 있었다. '희망을 잃고 분노와 절망으로 일그러져 가는 인간'을 소름끼치게 잘 표현해냈다.

그가 나온 영화들도 정주행해야지.

오늘은 조커 2회차 관람을 하러 가는 날! 배트맨시리즈들도 정주행 하는 날.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