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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자

홍콩 시위 이유와 배경 : 범죄인 송환법 & 아편전쟁

by Boribori:3 2019. 6. 20.

사진-연합뉴스

지난 3월 말 소규모로 시작되었던 시위가,

경찰들의 무력진압으로 점차 그 규모가 커져- 약 열흘 전에는 100만명의 홍콩 시민들이 거리로 나왔다.

2014년에 발생했던 우산혁명의 규모를 훨씬 뛰어넘는.

이에 홍콩 정부와 경찰들은, 시민들의 시위를 '폭동'으로 규정하며 시민들에게 고무 총까지 쏘며 시위를 진압했다.

이는 분노만 더욱 자극했을 뿐.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그 수는 늘어나 200만명에 달하는 시민들이 길거리에 모여 한 목소리로 외쳤다.

'No China extradition!' (중국 범죄인 송환 반대!!) ,  '캐리 람(홍콩 행정장관)은 사퇴하라!'

사진-bbc

중국 정부를 등에 업고 범죄자를 중국으로 송환할 수 있도록 하는 법을 실행하려는 캐리 람 홍콩 행정장관을 향해

홍콩 시민들이 격노하여 반대 시위를 벌이는 것.

-> 이번 홍콩 대규모 시위의 직접적 원인: 홍콩 정부가 중국을 범죄인 인도 대상지역에 포함시키려는 법 개정안에 반대.

 

#범죄인 인도 법안(범죄인 송환법)?

쉽게 말해 범죄인 인도법은 , 범죄를 저지른 사람이 해외로 도피하는 것을 막기 위한 법이다.

범죄인을 잡기 위한 국제협력을 증진시키는 게 목적. 즉, 외국에서 그 국가의 형법을 위반한 범죄인이 자국 내로 도피해왔을 때 그 외국이 요청하면 그 범죄인을 체포해 인도할 것을 약속하는 법.

 

-법안 발의 배경:

홍콩 커플이 대만으로 여행을 갔는데 남자가 여자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홍콩으로 귀국했는데,

홍콩 범죄인 송환법에 대만이 포함 안 되어서 남자를 대만으로 인도할 수 없었던 사건이 있었다.

이에 홍콩 정부에서 미래에 이런 일을 방지하고자, 중국도 범죄인 송환 대상국가에 포함시키자는 법안을 발의했다.

따라서 이 법이 시행되면 중국에서 범죄인이라고 규정한 사람이 홍콩으로 도망쳤는데 중국이 요청하면, 중국으로 보내야 한다.

- 홍콩 시위대 입장: 중국이 반공, 반중 등 반체제 인사를 중국으로 송환하는데 이 법을 악용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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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10일까지만 해도, 자신만만하게 법안을 철회하는 일은 없을 거라던 캐리 장관은 입장을 바꾸었다.

법안 심의를 연기하겠다(12일), 법안 추진을 잠정 중단하겠다(15일), 갈등 있는 한 재추진 않겠다(18일) ,,,

뿔난 홍콩 시민 + 중국을 대놓고 압박자극하는 트럼프와 미국 정부의 압력의 콜라보레이션 효과.

 

홍콩은 위치상으론 완전 중국인데 왜 중국이 아닌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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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 (중화인민공화국 홍콩 특별행정구)

홍콩은 '중국 대륙'의 남동부 쪽에 위치했으나 그렇다고 중국은 아닌,

'특별행정구'로, 사회주의인 중국과는 달리 홍콩은 자본주의, 민주주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이렇게 분명 위치만 보면 완전 중국인데, 왜 - 언제부터 이렇게 '특별'해졌을까?

오늘은 이 배경에 대해 정리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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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콩은 1842년, 제1차 아편전쟁에서 중국이 (당시엔 중국은 '청'이라고 불렸으나 여기선 그냥 중국이라고 칭하겠다.)

영국에 크게 패한 이후, 영국령으로 들어가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이 잠깐 점령했던 기간을 빼고

1997년, 영국의 홍콩 반환 이전까진 영국령으로, 영국의 통치를 받았다.

 

#1차 아편전쟁 (Opium war), 1839-1842

오래 전, 영국을 포함한 서양에선 중국의 물품(도자기, 차, 비단 등) 등이 매우 인기가 높아 잘 팔렸다.

 

특히 영국은 차 마시는 문화가 유행하여 질 좋은 중국의 차를 많이 사들여야 했다. 중국의 차와 비단이 영국인들의 삶에 없어서는 안 될 필수물품이라고 말해도 좋았을 정도.

반면 중국은 워낙 물자가 풍부하여 영국의 물건엔 별 관심이 없었다.

영국은 중국 물건을 수입하기 위해 엄청난 양의 은(당시 결제 수단)을 수입 대급으로 지불해야만 해 부담이 되었다.

심각한 무역 불균형.

 

사진-Extra Credits

 

그러다 영국은,, 좋은 수를 찾았다. 바로 중국에 아편을 파는 것. 그것도 식민지 인도에서 재배하여 만든 아편을.

사진-supchina

(아편은 양귀비라는 식물을 이용해 만든 마약.)

아편의 맛을 알게 된 중국 국민들로 인해, 어마어마한 양의 은이 영국으로 빠져나간다.

특히 당시 부정부패한 관료들에 실망한 국민들은 현실 도피를 위한 선택으로 아편을 피우게 된다.

(1770년대 무렵, 영국제 아편이 중국에 들어온지 얼마 안 되었을 때의 아편 판매량이 1천 상자였는데,

약 60년 후, 그 수가 4만 상자로 늘어났다고 한다.  아편전쟁 직전인 1830년대 말엔 중국의 아편중독자 수가 500만명이 넘었다고.) 아편은 마약이어서, 한번 중독이 되면 계속 피워야 하기 때문에 수입량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영국에 수출하는 차나 비단보다 사들이는 아편으로 나가는 은이 훨씬 많아 적자를 봐야했던 중국.

아편 때문에 납세나 결제의 수단이었던 은의 가치는 상승했고, 따라서 물가와 세금은 급상승했다.

이에, 세금 부담을 견디지 못한 백성들은 생업을 포기하고 유민이 되어 반정부 운동에 합류했고 점점 그 수가 늘어났고.

동시에 아편에 빠진 백성들의 수도 늘어나니, 나라가 휘청거릴 위험에 처했다.

이에 중국은, 아편과의 전쟁을 선포하며 관리들을 보내 영국 상인들로부터 아편을 빼앗아 불태워버리는 등 영국 아편의 수입과 유통을 엄격하게 금지시킨다.

 

영국은 이를 구실로 삼아, 중국을 공격하고 - 훨씬 높은 기술과 군사력을 가진 영국은 중국에 대승을 거둔다.

이게 아편전쟁.

중국은, 영국에 굴복하며 '난징 조약'을 체결한다. (1842년 8월 29일.)

패전국에 무지 불리한, 불평등 조약.

 

#난징 조약(=남경 조약) 주요 내용

1. 중국은 홍콩 섬을 영국에 넘겨준다.

2. 광동, 상해 등 5개 항구를 개항하고 개항장에 영사를 주재시킨다.

3. 중국은 전쟁배상금 1200만 달러, 몰수된 아편 배상금 600만 달러 등을 3년 안에 영국에 지불한다.

4. 공행(무역에서 폭리를 취하던 중국 상인조합)의 독점 무역을 폐지한다.

 

이렇게 난징 조약으로 인해, 홍콩은 영국 땅이 된다.  (1842)

1997년, 홍콩을 다시 중국에 반환하기 전까지.

 

#2차 아편전쟁 (1856~1860)

영국에게 훨씬 유리하게 체결한 난징조약. 그런데 영국은 자신들이 만든 이 조약에도 불만이 있었다.

'황금 알'을 낳아줄 줄 알았던 중국과의 무역이 생각보다 교역량이 크게 늘지 않았던 것.

중국의 5개의 항구를 개항하는 것은 성공했지만

항구가 아닌 중국의 내륙지역은 넘어가기 힘들었기 때문.

영국은 산업혁명으로 생산량이 과잉되어 자신들의 물건을 사줄 시장이 무엇보다 필요한데 말이다.

따라서 영국은 중국 내 다른 항구나 도시들의 개방- 통관세 폐지, 아편무역의 합법화 등

 난징조약을 개정하자며 요구했다. 그러나 중국은 이를 거절.

군사력도 훨씬 약한 국가에게 거절을 당하고 화가 난 영국은 무력을 사용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때 잡은 꼬투리가 애로호 사건.(1856년 10월)

 

#애로호 사건

영국인이 선장으로 있던 애로호라는 작은 배에 중국 관헌이 올라가 중국인 승무원 12명을 해적 혐의로 연행해 갔다.

애로호는 중국인 소유의 배였기에, 영국이 나설 명분은 없었으나,

영국은 국제법 위반이라면서 연행해간 승무원들을 즉시 송환하고 공개사과를 하라고 요구했다.

분명 전쟁을 일으킬만한 큰 사건은 전혀 아니었고 중국이 딱히 잘못한 것도 없었다.

그러나 영국은 고의적으로 사건을 확대시켰고 기다렸다는 듯이 프랑스와 합세해 중국을 공격하며 전쟁을 시작했다.

(프랑스 역시 아시아 시장을 넘보고 있었는데 마침 자국의 선교사가 포교활동을 하다 중국의 지방관에 체포되어 처형을 당하는 일이 생겼다. 선교 활동은 개항장 내에서만 가능했기에, 프랑스 선교사가 위법 행위를 한 것이었으나..)

이렇게 영, 프 연합군은 중국을 침략하고 점령한다.

 

#톈진 조약(1858), 베이징조약(1860)

전쟁에서 이긴 영국과 프랑스는 더 많은 도시와 항구를 개방하고, 자국의 선교사들의 활동을 보장하라, 거액의 전쟁, 무역 배상금 지불하라는 내용 등을 담은 불평등한 톈진 조약을 맺으려 한다.

그런데 중국 정부의 강경파는 조약 무효를 외치며 1859년, 영국 함대를 폭격하고 또 전투가 시작된다.

 영/프 연합국은 힘을 합쳐 중국의 수도 베이징까지 점령(1860)하고, 더 강화된 내용의 베이징조약을 체결한다.

거액의 전쟁 배상금은 물론, 톈진조약보다 더 많은 도시와 항구를 개방하고 구룽반도도 영국에 할양하며 아편 무역을 합법화한다는 조건  등으로.

 

2번의 아편전쟁에서 모두 크게 패한 중국...

어쨌든 홍콩은 영국의 욕심으로 인한 아편전쟁 때문에 중국에서 벗어나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1997년, 영국이 조차기간 만료로 홍콩을 반환하기 전까지니까 약 155년간, British Hongkong.

 

155년 동안 당연, 홍콩은 영국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1997년, 홍콩 반환.

영국령이 되기 전엔, 거주인구가 수천명에 불과했던 홍콩이라는 작은 섬은, 영국의 영향으로 인해 인구수가 점점 늘게 되는데 (중국의 사회주의를 거부하며 도피한 반체제 중국인들 등) 영국 입장에서는 머나먼 땅에 있는 조그만 홍콩 섬을 관리하기가 어려워서 곤란스러웠다.

이때 덩샤오핑이 솔깃한 제안을 한다.

중국에게 홍콩을 다시 반환해도, 50년가는 영국이 그동안 만든 사회 시스템을 유지하겠다고.

이렇게 1997년 7월 1일, 홍콩은 중국에 다시 반환되었다.

즉, 2047년 7월 1일까지.

50년 동안은 중국은 외교, 국방 문제 이외의 사회, 경제 등은 기존의 자본주의 체제를 유지하며 '특별행정지역'인 홍콩 자치정부에 맡긴다는,일명 '일국양제'조건. (즉, 하나의 나라 but, 2개의 체제. =중국의 일부분이지만, 중국의 사회주의는 따르지 않는다!!!)

 

50년으로 기약된 자치권이,, 지금이 벌써 2019년이니- 22년이 넘어간다.

뭔갈 하지 않으면 곧 , 중화인민공화국의 '인민'과 같은 신분이 될 것이라는 불안감. 절박함이,

 

지금 홍콩대규모 시위의 근본적인 동력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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