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1919년 4월 11일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날이다.
GS리테일은 GS편의점을 통해 이번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이른바 '독립운동가 도시락'을 출시하였다.
도시락에 임시정부 수립에 큰 역할을 한 47인의 독립운동가(인물들 명단은 국가보훈처가 선정)들의 생애, 업적 등을
간략하게 소개하는 내용을 담은 스티커를 붙이며,
이 도시락을 먹고 인증샷을 올리면 상해 임시정부를 탐방할 수 있는 이벤트도 내걸었다.
GS의 이런 캠페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작년 8월에는 '독립운동가 100인 알리기',
올해 3월에는 '잘 알려지지 않은 여성 독립운동가 51인 알리기',
그리고 이번 4월의 '임시정부 수립 주요 독립운동가 47인 알리기'.
...이는 칭찬받기에 마땅한 우리 역사 알리기라는 참 좋은 취지의 캠페인이다.
그런데 이번 도시락 캠페인의 스티커에는 논란으로 가득한 인물도 들어가 있었다.
그 이름도 유명한 이승만.
도시락에 붙어진 이승만 스티커엔, 아래와 같은 '업적'이 담겨있었다.
- 대한민국 임시정부 대통령 선출
- 워싱턴에 구미위원부 설립
- 대한민동지회 결성
- 주미외교위원부 위원장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 내용이 틀리다는 게 아니다.
과연 이승만이 이런, '독립운동가' 알리기 캠페인에 들어갈만한 사람이냐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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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이 독립운동가?
나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승만은,
불법적으로 헌법까지 바꿔가며 부정 선거들을 자행하며 민주주의를 짓밟는 독재를 했으며(1948~1960년, 대한민국 1~3대 대통령)
1948년, 제주 4.3학살로 수많은 국민들의 생명마저 앗았으며
그 외에도 셀수없는 비리들로 인해 탄핵당했던 사람이다.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사흘만에 한강에 놓여진 다리를 폭파해 피난민들의 발목을 잡았던,
그러면서도 자기는 몰래 기차타고 유유히 서울을 빠져나갔던 사람.
한국전쟁 전후에 자행된 100만명의 민간인 학살의 배후에도 당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이 있었다.
물론 광복 이후에 한 짓들이지만.
다른 업적들이 아무리 대단했더라고 치더라도, '독재자'와 '학살자'였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그리고. 광복 이전, 일제강점기 당시 있었던 그가 했던 독립운동들?
여기에도 난 전혀 그의 행보에 긍정적인 생각을 할래야 할 수가 없다.
우리나라의 독립운동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운동 중 하나인 3.1운동에도 이승만은 아무런 도움도, 영향도 끼치지 않았다. 당시 그는 미국 하와이에 있었고 3.1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도 9일 후에서야 알았다.
물론 이승만은 하와이에서 나름 독립운동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게 모두 자신의 권력욕을 채우기 위함이었던 것 같지만.
그리고 미국은 그런 이승만을 아주 좋아했다. 이승만은 뼛속까지 친미 인물이었으니까.
(좋아했다기보단 자신이 원하는 한국 만들기에 이용가치가 크다고 생각하니 이용한 것으로 생각.)
이승만은 독립조차도 미국을 등에 업고 하기를 원했던 사람이다.
그는 3.1운동 이후, 당시 윌슨 대통령에게 국제연맹이 우리나라를 '위임통치'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위임통치라니.
일본제국 밑에서 극심한 착취를 당했던 우리나라 국민들은 우리 힘으로 독립을 해,
무엇보다 다른 나라에 더 이상 휘둘리지 않는 우리만의 주권을 가지길 원했는데 이승만은 그 반대였던 것이다.
국제연맹의 위임통치를 받는다는 것은 일본의 식민지에서 미국의 식민지가 된다는 뜻.
조선 땅에선 수백만의 동포들이 일제의 총칼과 모진 고문에도 목숨을 잃어가면서도 독립운동을 하고 있을 때
이승만은 미국보고 일본 대신 미국이 지배해달라고 청원하고 있었던 것.
(위임통치는 미국 대통령 윌슨이 제창된 식민지적 국제통치형태이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한 나라들이 가지고 있던 식민지들 중 자치능력이 없는 나라를 국제연맹이 통치할 수 있게끔 하는. )
독립운동가 신채호 선생은 이를 두고
'이완용은 있는 나라를 팔아먹었지만, 이승만은 찾지도 못한 나라를 팔아먹은 놈'이라고 혹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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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의 인생은 고달팠다.
일제강점기 때는 그럴 수밖에 없었겠지만 일제로부터 해방된 이후에도 마찬가지였다.
해방된 이후에도 일제에게 아부하며 권력과 재산을 키운 매국노, 친일부역자들이 청산되지 못하고 그대로 권력을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승만은 ^독립운동가^였다지만 해방 후에'도' 행운을 누릴 수 있었다.
(이승만은 해방 전 독립운동 중에도 별다른 위험을 겪지 않았다. 딱히 힘들고 위험한 일도 하지 않았을 뿐더러
국민들이 독립을 부르짖으며 목숨을 내걸고 투쟁할 때도 그 자리에 없었기 때문이다. 우연히 없었는지 피했는지는 모르겠지만. )
단지 운이 좋았던 것일까?
아니다.
미국에게 잘 보였기 때문이다.
일제강점 이듬해인 1911년, 일제는 독립운동을 탄압하기 위해
데라우치 총독의 암살 음모 사건을 조작하며 독립운동가 105인을 감옥에 잡아 가두며( 일명 '105인 사건') 혹독한 고문을 가했던 적이 있다. 이 때 신민회 회원들은 물론 기독교인 700여명이 구속되었지만 당시 YMCA 간부였던 이승만은,
놀랍게도 미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어떻게?
일본 정부가 발행한 일본인 여권으로.
이 여권을 어떻게 받았냐고?
친일파로 유명했던 미국인 해리스(당시 감리교 감독)의 도움으로. 그는 이승만의 출국허가를 일본정부에 요청해 얻어주었다. 그리고 그렇게 미국에서 지낼 수 있게 된 이승만.
위에서 언급했듯이 미국에서 지내며 3.1운동엔 아~무 영향을 끼치지 않았던 이승만은
역설적으로 3.1운동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3.1운동이 있었던 1919년,
그리고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는데.
이승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이 된다. 무려 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임시정부 수립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3.1운동 당시, 그리고 그 전에도 쭈욱 미국에 있었던 사람이!)
그런데 1919년~1925년, 이 기간동안 이승만이 상하이에 있었던 기간은 6개월밖에 되지않았다.
그나마 있었던 그 기간에도 툭하면 상하이 밖으로 관광을 떠났다고 한다.
어렵게 수립된 임시정부의 아주 불성실한 대통령이었던 이승만은 1925년, 탄핵을 당한다.
첫번째 탄핵.
그런데, 이승만은 탄핵을 당했어도 별로 개의치 않았다.
여전히 그는 미국의 총애를 받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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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904년(당시 29세)에 미국으로 유학을 간 것을 시작으로
그의 나이 70세가 될때까지의 대부분의 시간을 미국에서 보냈다.
1904년 미국에서 공부하며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1910년 잠깐 귀국했다가 2년 후 다시 미국행.
상하이에 있던 임시정부의 대통령으로 6년간 있었을 때도 6개월 정도만을 상하이에 있었다.
그러다 탄핵을 당했고. 그리고 다시 미국행..!
이승만은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 맥아더 장군이 제공한 군용기를 타고 멋지게 귀국하신다.
그리고 1948년. 그는 미국의 지원으로 대한민국 정부에서도 대통령이 된다.
임시정부에서 무책임, 불성실한 행적으로 탄핵당했던 사람이 또 대통령.
무려 12년 동안을. (이승만은 1960년, 4.19혁명으로 또 탄핵당한다.)
그리고 그는 1948년 9월, 제헌국회에 의해 제정된.
반역행위를 했던 친일분자들을 청산하자는 특별법에 의해 구성된 반민특위(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도 노골적으로 방해하며 해산시켰다. (왜 방해했을까..??!)
하긴 최강국 미국을 등에 업었는데 무서울 게 없었을 테다.
이승만은 사실 더 독재를 하고 싶었지만 탄핵을 당해서 대통령직에서 내려올 수밖에 없었다.
2번이나 탄핵당했던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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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겉으로 보면 독립운동을 하기는 했으나
나라를 위해서 한 운동이 아닌, 자신의 권력과 이로움을 위해 했다는 것.
독립운동이 자신의 삶을 위태롭게 했다면 절대 하지 않았을 인물이다, 그는.
나는 이런 사람을 '독립운동가'로 인정할 수 없고
그가 우리나라 대통령을 지냈다는 사실이 참 많이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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