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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자

3.1독립운동 100주년, 그리고 친일파.

by Boribori:3 2019. 2. 28.

내가 태어난지 정확히 81년 전인, 1910년 8월 29일, 은 우리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국권을 상실한 날이다.

일제는 적법한 절차를 무시하며 강압적, 그리고 불법적으로 조약을 공포했고 그렇게 우리나라는 일본제국의 식민지가 되었다.

한일합병조약.

 

 

한일합병조약은 친일 행적으로 이토 히로부미의 눈에 들고 내각총리대신이 된 매국노 이완용과,

제3대 한국통감 데라우치가 비밀리에 만나 자기들끼리 회의하고 통과시킨 일방적인 조약이다.

당시 대한제국의 황제였던 순종의 승인은 생략된.

이 조약이 공포된 이후 36년간 참혹한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를 군사적, 물적, 문화적, 민족적으로 말살하려던 일본제국의 철저한 탄압 속에서도

우리나라 사람들은 독립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았으며, 하나뿐인 목숨을 바쳐서까지 독립운동을 하였다.

수많은 크고 작은 독립운동 중에서도 3.1만세운동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 민족 모두가 한 마음 한 뜻으로 나라의 독립을 외친,

그리고 빠르게 한반도 전역으로, 해외로 퍼져나간 , 지금의 대한민국 정부 수립의 기원이 된 아주 역사적인 사건이다.

신분과 성별, 세대를 뛰어넘은, 우리 민족 모두가 독립을 위해 거리로 나간 일제 강점기 최대 규모의 민족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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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대표 33인 독립선언 기록화 / 출처-33인유족회 )

1919년 2월 27일.

종교계의 명망있는 인물들로 구성된 민족대표 33인(천도교15명, 기독교16명, 불교 2명)이

 서명을 한 독립선언서는 2만 장이 넘게 찍어졌고 배포되었다.

(1910년, 일제의 무단통치가 시작되면서 종교계 이외의 국내 다른 항일단체들은 씨가 말라 있었다.)

(기미독립선언서. 1919년 기미년 3.1독립선언서, 왼쪽 명단은 민족대표 33인의 명단.)

 

그리고 사흘 후 1919년 3월 1일.

일본에게 나라를 빼앗긴지 9년이 되어갔던 해..의 첫 봄날. 3월, 그리고 1일.

 서울 인사동에 위치한 태화관에서 모인 민족대표들은 독립선언서를 크게 낭독하며 대한독립만세를 외쳤고

같은 시각, 태화관에서 300m 떨어진 종로 탑골공원에서는 수천명의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며 만세운동을 하였고

행진을 시작하였다. 행진을 할수록 점점 많은 사람들이 참여하여 학생, 아이, 노인, 부녀자, 농민, 백정, 광대, 상인 등 남녀노소, 직업, 계층, 종교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소수의 친일파들을 제외하고 모두 함께.

엄청난 숫자의 사람들이 행진을 하며 거리를 가득 채우니, 멀리서 보면 사람들이 움직이지 않고 제자리에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라 했다.

나라를 빼앗긴지 10년만에 처음으로, 밝은 태양 아래 태극기를 내걸고서.

물론 일본이 가만있을리 없었다. 총칼, 몽둥이를 들며 무자비하게 진압하여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그러나 3월 1일의 이 만세운동은 시작을 알리는 종소리일 뿐이었다.

3.1운동은 전국 방방곡곡에 퍼져 수개월동안 지속되었으며 몇백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이 소식을 들은 해외에서도 만세운동이 일어났다.

 

이 운동을 계기로  한 달 후인 1919년 4월 11일,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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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많은 독립운동가들을 가두고 고문하였던 서대문형무소)

 

물론 일제가 이 과정에서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일제는 나라의 독립을 외치던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총을 쏘고 몽둥이로 두들기고 칼로 찔러 죽이는 학살을 저지르거나,

체포해서 감옥에 가뒀다.

체포된 사람들은 ....

차라리 죽는 게 나을 정도의 극심한 고문을 받아야 했다.

집게로 발톱을 뽑았고 발가벗기고 갈고리로 피부를 찢었고 달군 쇠붙이로 몸을 지졌고, 여성일 경우 차례로 강간하며 수치심을 주는 만행도 서슴치 않았다.

3.1운동은 비폭력 항쟁으로, 무기없이 맨몸으로 독립 만세만을 외쳤던 시위였음에도.

 

<일제가 독립열사들에게 가한 고문들 중 일부>

- 펜치로 손톱, 발톱을 강제로 뽑음

- 벽관 고문: 사람 한명이 간신히 서 있을 수 있는 공간 뿐인 세워진 관속에 사람을 가둠

- 말린 황소의 생식기로 여성 독립열사들의 성기 훼손

- 거꾸로 매달아 놓고 콧구멍에 고춧가루 물 붓기

- 전기고문

- 손톱과 발톱 사이 대나무 못 박기

- 인두로 몸 지지기

- 못 박은 널판에 눕히기

- 달군 쇠붙이로 생식기를 지짐

- 많은 사람이 보는 앞에서 칼로 양쪽 가슴을 도려냄

- 물이 든 독 안에 나체로 가둔 후 사지를 묶어놓고 미꾸라지를 풀어놓음 (미꾸라지가 음부, 항문으로 들어감)

 

3.1운동에 참가했다가, 고향 천안으로 내려와 서울에서 있던 3.1동을 전하며 만세운동을 주동했던 유관순 열사 역시 체포되어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녀의 나이 겨우 18세.

 (유관순 열사의 서대문감옥 수형자 기록표 사진)

 

(일제가 3.1운동 직후 조선 여학생들에게 성고문을 했다고 기록된 문서. 출처-뉴욕한인교회)

(국내에서 선교활동을 하며 일제의 만행을 직접 목격한 미국 선교사들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된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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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1920년 9월 28일, 유관순 열사는 열아홉, 너무나도 어린 나이에 차가운 형무소 바닥에서 모진 고문으로 숨을 거둔다.

사인은 방광 파열.

유관순 열사의 시신은 여섯 토막으로 잘려있었고 머리엔 고문으로 잘려나가 코와 귀가 없었다.

그토록 열망한 조국의 독립은 보지 못한 채.

...이렇게 수많은 독립투사들은, 나라의 독립을 외친다는 이유만으로 잔인하고 끔찍한 고문을 당하다 죽어갔다.

알려진 게 이 정도지, 일제의 탄압 아래 사실 더욱 셀 수 없는 선량한 시민들이 무차별하게 학살당하다 소중한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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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100주년을 맞는 오늘날.

일제의 잔재는 여전히 남아있다.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동포들을 사지로 내몰고 심지어 같은 민족 독립투사들에게 고문까지 직접 자행하며 일제의 예쁨을 받으려했던 친일파들.

 

 

그 친일파와 그 후손들은 정치인, 고위공무원, 재벌들이 되어 호의호식 하는 중.

 

(뉴스타파의 보도에 따르면 친일파 후손 1177명 중 376명이 기업대표 혹은 임원, 191명이 대학교수, 41명이 의사, 46명이 언론인, 346명은 한국 국적을 버렸다고 하고 163명은 정치인, 고위공직자, 법조인 등의 국가의 공적영역에서 리더역할을 하는 그룹에서 일한다고 했다.

 친일반민족행위자 후손 475명 중 서울과 경기도에 거주하는 사람이 84%. 서울에 거주하는 친일 후손 절반 가까이는 강남3구에 주택 소유.

또한 친일재산조사위에서 4년간 친일재산 추적 업무를 담당했던 홍경선 교수에 따르면

일제강점기 동안 친일파가 축적한 토지규모를 추산하면 대략 4억 3천만 제곱미터(현재 서울 면적 2/3)에 이른다고 한다.

이 땅들 중 0.3%만이 국가에 환수되었다고. 해방 후 70여년간 친일 청산 수준을 여실히 보여준다.)

 

친일파들의 동상, 기념물들 역시 학교에, 기념관에, 공원에 꿋꿋이 버티고 있다.

강제 징용과 징병을 찬양하고 소년들에겐 일제를 위한 학병에 지원하라 부추기고 소녀들에겐 위안부에 지원하라 부추기던 사람들의

동상을 학교에 세우고 학생들에게 무엇을 가르칠 수 있을까?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 미래는 없다.

조국의 독립을 위해 목숨까지 바친 독립투사들의 영령을 조금이라도 생각한다면

이러한 일제 잔재의 상징물들 철거부터 시작해야 하고

역사를 왜곡하려는 이들에 선동되지 않는 올바른 역사를 나부터 알고, 자녀들에게 교육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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