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제주 4.3 항쟁이 일어난지 69주년 되는 날.
추념일이 있는 이유는 매일매일이 바쁜 일상 속에서 많은 것들을 놓치고 그냥 지나치게 되지만,
그래도 일년에 한번이나마, 그 때를 생각하고 기억하기 위해서이다.
.
.
<요약>
1947년 3월 1일을 기점으로 1948년 4월 3일에 발생한, 제주도에서의 시위중인 군중들과 경찰/군인들의 유혈충돌사태.
1954년 9월 21일까지 무력충돌과 진압 과정에서 수많은 제주도 주민들이 목숨을 잃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한국전쟁 다음으로 인명피해가 많았던 비극적인 사건.
(사진출처: http://jejupark43.1941.co.kr/pages.php?p=2_3_1_1 영상캡쳐. )
<배경>
1945년 8월 15일,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통치로부터 벗어나, 독립함으로써 나라의 주권을 되찾은 광복절을 맞았다.
온 국민이 기쁘고 새로운 삶을 시작하리란 희망에 겨웠었다. 그러나 이 기쁨도 잠시.
1945년 12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처리를 위해.
모스크바 3국 외상회의(모스크바에서, 미국, 영국, 구소련 사이의 회담.) 가 열렸다.
이 회의에서는 우리나라는 아직 혼자 일어날 힘이 없으므로 신탁통치를 해야한다는 결정이 났고 ,
이를 진행하기 위해 미소 공동 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미국과 소련은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에 주둔했다.
그리고 한반도의 정치 지도자들도 좌우로 이념이 갈라져 대립했다.
이 위원회는 한반도의 통일정부 구성 건에 대해 여러차례 회담을 가졌지만,
미국과 소련은 잦은 의견 충돌로 대립이 잦았다. 서로 싸우다가, 미국은 남한만이라도 단독으로 선거를 하여 정부를 구성하는 것을 제의하고 유엔에 이 문제를 상정했다. 유엔은 이 안건에 찬성하며, 1948년 5월 10일, 남한에서의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기로 했다.
광복이전의 우리나라는 분명 하나였는데. 남한에서만의 선거를 하겠다는 건 남북으로의 분리를 의미했다.
이를 받아들일 수 없어, 많은 사람들은 남한에서만의 총선거를 반대하며 전국 곳곳에서 시위, 유혈사태가 발생했다.
이중 특히 시위가 극심하여 대규모 피해가 일어난 곳이 제주도이다.
<제주도라는 특수배경>
(사진출처: 제주의소리)
제주도는 한, 중, 일 동아시아의 중앙에 자리잡고 있는 일본이 전략적 요충지로 삼고 있던 특수 지역이었다.
'제주 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에 따르면,
일본은, 한국을 식민지화한 이후, 1937년 : 중‧일 전쟁 때 제주 섬 서쪽지역인 모슬포에 비행장을 만들고 오무라(大村) 해군항공대를 설치, 중국 대륙을 향한 도양 폭격기지로 삼더니, 제2차 세계대전 말기인 1945년 초에 이르러서는 일본 본토 사수를 위한 대미(對美)결전의 최후 보루로 제주를 선택, 섬 전체를 요새화하였다고 한다. 또한 1945년 8‧15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전엔, 제주도는일본군에게는 본토사수를 위한 ‘최후 보루’로, 전쟁 상대인 미국군에게는 일본으로 진격하기 위해서 반드시 ‘점령해야 할 섬’으로 부각되었다.
또한 26년여간 4.3사건의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 매달린 김종민 전문가에 따르면.
1945년 8월 기준 인구 25만여명의 제주도에 6만7천여명의 일본군이 주둔했다고.
. 제주도민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할 나이가 되면 마을별 몇 명씩 할당돼 일본군의 군사시설 구축에 강제동원됐으며 건설하다가 중상을 입는 경우도 허다했다고 한다.
http://www.hani.co.kr/arti/culture/travel/788485.html#csidxdce1b6c8e1f8549a87b44a8e50046d0
이러니,
일본에 한이 많을 수밖에 없던 제주도민.
그러나 일본의 무조건 항복으로 제2차 세계대전이 끝이나고 제주도에 머물던 일본군이 물러가자 광복과 동시에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제주4.3평화재단에 따르면,
<직접적 도화선, 3.1절 발포사건.>
1947년 3월 1일은 3.1절 28주년이었다.
제주도 곳곳에서는 3.1절 기념집회가 열렸었는데 이 때 한 광장에서 이를 구경하던 어린아이가 경찰이 탄 말에 치여 다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때 경찰은 그대로 가려고 했고 이에 분노한 일부 군중이 경찰에 돌멩이를 던졌고, 경찰은 군중에게 총을 발포했다. 6명 사망. 8명 중상. 이들 대부분은 근처에서 구경하던, 일반 주민이었다고 한다.
이 3.1절 발포사건은 군중들의 분노를 사며 4.3사건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다.
이 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은 반경찰 반정부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이상이 총파업에 참여했고,
이에 경찰은 1년동안 이들 2500여명을 구금시키며 고문도 마지않았다.
.
.
<경과 >
제주도 사람들은 남한만의 단독선거에 반대하는, 남한 단독정부 수립 반대 시위를 벌였다.
1948년 4월 3일. 350명의 무장한 제주도 사람들은 제주도 내 12개의 경찰서로 몰려가 단독선거를 반대한다는 무장시위를 했다.
슬로건은 "군중에 대한 폭력적 탄압 금지와 남한 단독 선거 / 단독 정부 수립 반대, 통일정부 수립 촉구" 였다.
그러나 이들의 시위를 군인들은 화염, 총칼 등 지금은 상상할 수도 무자비한 방법을 사용해 국민들을 진압하며, 폭압의 명목을 '공산계열의 반민족적이며 파괴적인 분자들의 지도 아래 흉기를 가진 무장세력들이 경찰서, 관공서, 선량한 동포 등을 살해하며 방화 및 폭행하며 만행을 저지른다' 라고 했다.
제주도 내에서의 치열하며 피비린내 나는 단독선거 반대 항쟁에도 불구하고,
1948년 5.10 총선거는 진행되었다. 이 때 제주도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이 총선거를 거부한 지역이었다.
<비극적 결과 >
이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운 국민들과 군인들의 충돌은 1954년 9월 21일(한라산 전면 입산 통제를 해제하며 대규모 진압이 종결된 날)까지 계속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날 때까지 계속된 셈.
(사진출처: http://jejupark43.1941.co.kr/pages.php?p=2_3_1_1 영상캡쳐. )
이 과정에서 당시 제주도 사람의 1/9 이상인, 3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부상당한 사람들은 셀 수 없이 많았다.
마을은 불에 타 폐허가 되었다.
통일된 국가를 원한다는 국민들의 시위를 같은 나라의 군인이, 수만명의 사람을 죽여가며 폭압한 이 사건은
우리나라 역사중 가장 부끄럽고 비극적인,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될, 말도 안되는 사건이다.
( 제주 4.3사건으로 희생된 가족의 시신앞에서 울고 있는 여인. 사진출처: http://h2.khan.co.kr/view.html?id=201704031656001)
<반세기가 지나서야 이뤄진 역사적 재조명>
제주 4.3사건은 언급 자체가 금기시되었었고 진상규명은 커녕, 우익파들은,
4.3사건 당시 제주도민들을 폭력적이며 사상이 불순한 사람들로 취급하였었다.
실제로 전두환 정권 때의 교과서엔, 이 사건을 '폭동'이라 서술하며
“공산 무장 폭도가 봉기하여 국정을 위협하고 질서를 무너뜨렸던 남한 교란 작전 중의 하나”라고 표현했다.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역사적으로 재조명되기 시작했고 '폭동'에서 '민주화운동', '민중항쟁'으로 명예회복이 시작되었다.
2000년 1월, "4·3특별법" (제주4·3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되면서
정부차원의 진상 조사와 피해자 파악이 실시되었다.
이후, 2003년 10월, "제주4·3사건진상조사보고서"가 채택되고, 대통령(당시, 노무현 대통령)은
4.3 사건 발생 후 처음으로 국가 차원에서의 공식 사과를 하였다.
(출처: 제주 4.3 평화재단)
위의 진상보고서에 의하면, 4·3사건의 인명 피해는 25,000∼30,000명으로 추정되고, 강경진압작전으로 중산간마을 95% 이상이 불타 없어졌으며, 가옥 39,285동이 소각되었다.
이 보고서는 http://jeju43peace.or.kr/pages.php?p=4_2_1_1 링크 타고 들어가면 다운받아 볼 수 있다.
615페이지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Daum백과] 제주 4·3사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69년전 이맘때의 제주 4.3사건은 2014년부터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어(4.3희생자 추념일) 공식적으로 추모하고 있다.
광복 이후 일본으로부터 겨우 벗어났는데 , 분단국가라니.
이를 반대하며
[Daum백과] 제주 4·3사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학중앙연구원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통일된 세상을 원하는 민중들의 외침을 쏘고, 찌르고, 고문하고 불태우며 집단학살시킨 이승만 정권과 미군정.
그리고 이를 공식적으로 사과했던건 그들이 아니라 노무현 전 대통령이었다.
4.3 사건으로부터 69년이 지난 지금도 유족들은 그때의 악몽으로 괴로워한다.
나는 4.3 사건이 '민주항쟁' , '민주화운동' , '시민운동' 등이 아니라, 그냥 '사건'이라고 불려지고 있는 것
역시 마땅치 않다고 생각한다.
국가 공권력으로 인해 희생당한 영혼들의 넋을 기리며 그 유족들에겐 적절한 피해보상을.
그리고 제대로 된, 역사교육을 통해 이 비극적 사건에 대한 국민들의 역사적 의식 고양이 필요하다.
잊지말고 기억하자.
사람마다 입장과 가치관이 다르므로.
정치적인 견해는 다를 수밖에 없고, 다양한 목소리와 색깔들이 나오고 나타나는게 건강한 민주주의 국가이다.
이를 자신들이 끌어가려는 바와 다르다고 억압하고 짓누르면서 통제하려고 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
이전 과거에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이에 대해 확실한 규명을 함으로써
이후에 다시는 그러한 일이 발생하지 않도록 하며 과거를 통해 배워나가야 할 것이다.
잘못한 건 아는지, 시간으로 덮어버리려고들 하는데 .
국민들은 더이상 당하고 있지만은 않는다 이제.
5.18민주화 운동, 6월 항쟁. 그리고 세월호.
선명하고 아렸던 아픔도 시간이 흐를수록 희미해져갈 수 밖에 없는데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래서 국가적 추념행사와 제대로된 교육을 통해 다시는 그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것이 중요하다.
'역사를 알자' 카테고리의 다른 글
문재인 대통령님께. 절대 용서하지 마십시오. (1) | 2017.05.11 |
---|---|
미국, 아프가니스탄 공습. 태양절 앞둔 북한에 경고? (2) | 2017.04.15 |
견원지간인 인도와 파키스탄. 분쟁 원인? (2) | 2017.03.30 |
안중근 의사 순국 107주년, 기억하자 대한민국. (0) | 2017.03.25 |
3년. 박근혜는 못했던. 아니 안했던, 세월호 인양 (0) | 2017.03.2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