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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자/중동지역

이란혁명 그리고 이란·이라크 전쟁 배경 및 결과, 의의.

by Boribori:3 2017. 6. 4.

이전 글들에 중동전쟁 1~4차까지에 대해 포스팅했었다.

(1~3차 중동전쟁: http://boriborikim.tistory.com/216
 4차 중동전쟁: http://boriborikim.tistory.com/225

중동전쟁 1~4차까지는 이스라엘과 다른 이슬람교 아랍국가들과의 싸움이었는데 5차는,

이란과 이라크. 둘 다 이슬람교가 국교인 국가들 간의 전쟁이다.

 

요약

언제: 1980년 9월 22일 ~ 1988년 8월 20일

누가: 이라크의 사담후세인(이라크의 제6대 대통령)이 이란 침공

어디서: 이란, 이라크, 페르시아 만

왜: 샤트알아랍(shatt al Arab)강 소유권 획득 , 이란혁명 일으킨 호메이니 정권 타도.

사상자: 백만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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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과 이라크는 각각 테헤란, 바그다드를 수도로 둔 , 국경을 접하고 있는 서남아시아 지역의 국가이다.

같은 중동지역에 위치하고 있고, 둘 다 대부분의 국민들이 이슬람교 신도이나, 둘은 오랜 세월동안 분쟁이 매우 많았었다.

 

그렇다면, 왜?..

 

이란-이라크 전쟁 배경 및 전개

 

1. 종교

-> 같은 이슬람교이긴 하나, 다른 교리를 가진 시아파, 수니파 구성정도.

->  이란은 인구의 90%정도가 시아파이며 이라크는 수니파가 35%나 된다.

(자료출처- 연합뉴스)

그런데 같은 이슬람인데 왜 문제가 되냐고?

예전에 이슬람교의 시아파, 수니파에 대해 정리글을 썼었는데 참고하라.

(이슬람교 분쟁원인글 링크: http://boriborikim.tistory.com/188 )

 

2. 민족

이란은 페르시아인, 이라크는 아랍인이 큰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이 두 민족은 엄~청 옛날부터 사이가 나빴다. 

(이란은 페르시아어, 이라크는 아랍어를 쓴다. 2년 전 에콰도르에 여섯 달 정도 살았을 때 이란 친구랑 친했었다. 그 때 나는 당연히 이란도 아랍어를 쓰는지 알았었는데.. 친구가 절대 아니라면서, 그런 오해를 많이 받기는 하는데 전혀 관계 없다고 사람들이 좀 알아줬으면 한다고 했다..)

 

 아랍인들은 이슬람 이전(예언자 무함마드가 이슬람교 창시하기 전)의 전통은 부정하며, 이슬람 이후의 문명만을 인정하며 따른다고 한다.

면 이란은 이슬람 이전의 시대를 존중한다. 

또한 아랍인들은 637년,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1935년 이전까지 이란의 국명은 '페르시아 제국'이었다) 이슬람제국을 건설한다. 이 과정에서 이란인들은 아랍인들의 지배 하에 놓인다.(1258년까지)


 

 

3. 영토 -> 이란-이라크 전쟁의 직접적 원인.

이란과 이라크 사이엔  '샤트알아랍(shatt al Arab)'이라는 강이 있다. 이 강은 페르시아 만과 연결되어 교역을 위해 경제적으로 무척 중요한 곳이었다. 이란, 이라크는 1930년대부터 이 강은 우리 것이다 ~ 하고 강의 소유권, 경계선 설정 문제를 두고 싸웠다.

                                                                 

(사진출처- the newyork times)

 

 

(사진출처-Durham university)    

 

(참조링크: https://www.dur.ac.uk/ibru/resources/iran-iraq/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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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이라크는 영국(당시 중동지역에 엄청난 영향을 미침)의 지원을 받아 이란과 샤트알아랍 강 소유권에 대한 조약을 맺는다.

이는, 이라크에 매우 유리한 조건이었다. 샤트알아랍 강을 지나가는 모든 배는 이라크 국기와 이라크 조종사를 둬야하고 이란의 배가 샤트알아랍 강을 지날 때마다 이라크에게 통행료를 지불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다 

1969년 4월 15일. 이라크는 이란에게 샤트알아랍 강의 수로는 이라크 영토이니, 이란 해군의 출입을 금지하며 일반 선박들 역시 수로 내에선 이란 깃발을 달면 안된다고 경고한다.

이에, 1969년 4월 22일. 이란은 보란듯이, 해군과 공군을 모아 호위하게 하고 이란 깃발을 단 선박들을 항해시켰다. 그러면서 이란의 팔레비 정권은 1937년 어쩔 수 없이 맺었던 불공평했던 국경협정을 파기하고 샤트알아랍 강에서 이란 선박에 대해 간섭 행위는 무력충돌을 야기할 것이라고 선포하였다.
그리고, 이란은 샤트알아랍 강을 마음대로 드나들었다.

그런데? ..이라크는 딱히 대응할 수 없었다.

왜냐, 이라크 자체 내에서도 쿠르드족(이라크로부터 독립하려함)과의 싸움으로 인한 내란도 있었고 시리아, 요르단 등과 함께 이스라엘에 대항하는 병력들을 투입하고 있었기에  또한 1967년 이스라엘과의 6일전쟁 싸움에서 많은 군사를 잃었기에 이란에게 보복할만한 군사력이 없었던 것이다.

 

이란은 이를 틈타 이라크 내의 저항세력인 쿠르드족을 지원했다. 그래도, 이라크는 이란에 손을 쓸 수가 없었다. 내란 진압만 해도 충분히 바빴기 때문.


그러다 1975년. 알제리에서 OPEC(석유수출국기구)정상 회담이 열렸고, 여기서

이란은 쿠르드족을 지원하지 않겠다, 이라크는 이란이 예전부터 제안해왔던(그러나 1937년 영국의 지원으로 실패했었던), 샤트알아랍강의 가장 깊은 곳을 중심으로 한 국경분리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 Algiers Accord(알제이 협정)

알제이 협정은 반대로 이란에게 유리한 협정이었다.


                                                       (자료출처-위키피디아)

 

 

4. 이란혁명과 이라크 사담후세인 당선.

 

그리고 1978년 2월 - 1979년 4월, 1년이 넘는 이 시간동안 이란에선 사회적 불평등, 부정부패, 사치로 가득했던 독재정권 팔레비왕조(정권이었음. 무려 1925~1979년 독재-_-)에 반대하는 '이란혁명'이 일어나 수십년간 독재했던 팔레비왕조시대는 막을 내리고, 호메이니가 이란의 최고지도자가 된다.

(사진출처-Muftah)

 

호메이니는 참고로 , 급진 시아파였이며 반미감정이 강한 자였다.

(참고로 그가 무너뜨린 팔레비 정권은 친미정권이었다. ) 그는 이란의 최고지도자의 자리에 오른 후 미국과 이란과의 관계를 끊는다.

따라서, 호메이니가 이란의 최고지도자로 된 이후, 미국의 - 중동지역에 대한 영향력이 크게 감소하였다.

이란사람 말고도 아랍권의 많은 이슬람신도들이 호메이니를 지지했거든.

 

따라서 , 호메이니 = 반미이슬람주의  라고 할 수 있다.

 

(잠시 후 설명하겠지만 미국이 이를 가만 보고있을리 없다. 이라크를 지원하겠지?)

                                                     (호메이니. 사진출처-위키백과)

 

(호메이니는 많은 시아파 이슬람교도들에게 영적인 지도자로 인정받았으며 일생을 청렴하고 금욕적이게 산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같은해 1979년 7월. 이라크의 새 대통령으로 사담 후세인이라는 사람이 당선된다.

                                           (자료출처-위키피디아)

 

 

사담 후세인은 수니파였다.  이란의 호메이니 정권은 시아파 이슬람혁명을 일으키려 하는 급진 시아파라 했었다 ..

이 둘의 관계가 좋을리 없었다. 안그래도 안좋았던 이란-이라크 관계는 사담후세인과 호메이니가 각국의 지도자가 된 이후 더 나빠진다.

 

그는 이란의 이란혁명이 이라크 내 시아파 세력들에게도 파급되는 것을 두려워 하고(실제로 이란은 이라크의 반정부 아랍인들을 지원하였다.) 같은 입장이었던 미국의 지원을 받아 군사력을 키운다.

이 때 미국 역시(당시 미국: 로널드 레이건 정권) 이란의 혁명이 중동지역 전역에 파급될까 두려워하여 이란과 대립관계인 이라크에 거액의 무기를 공급하며 CIA를 이용해 많은 군사정보를 제공한다. 이란의 새 지도자 호메이니가 자신과의 관계를 먼저 등졌기도 하고, 라이벌 소련이 이란을 공격하니, 가만 두고볼 수도 없고. 명목도 딱 좋았겠다.

그런데 이 때 미국은 , 이라크를 지원만 한 것이 아니었다. 이라크가 화학무기를 무차별적으로 사용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하는 것을 보고도 아무 소리 하지 않았다. ->  이후 2003년 미국의 이라크침공의 명분이 됨.

 

영국, 프랑스는 이란-이라크 전쟁 초기부터 이라크에 무기판매를 함으로써 꽤 짭짤한 수입을 봤다고 한다.

 

 

그리고 1980년, 이라크는 많은 서방국가들의 지원에 힘입어 이란을 선제공격! 한다. 8년 피비린내나는 비극의 시작이었다.

(전쟁 전인 1979년 11월부터 1981년까지, 이란은 이란 주재 미 대사관 직원 약 50여명을 납치해 인질로 데리고 있었다. 이는 안그래도 이란혁명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던 미국과 서방국들의 불난 집에 부채질을 하는 격이었다. 이란은 서방국으로부터 경제봉쇄조치를 당한다. 또한 1979년 초까지 전개된, 이란혁명 과정에서 군사력도 약화되고 정치적 혼란기를 겪고 있었다.. 이라크로서는 이란을 공격하기 딱 좋았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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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 이라크 전쟁 결과

 

이란 이라크 전쟁은 8년이나 계속되었다.

당시 미국으로부터 엄청난 군사적, 외교적, 경제적 지원을 받던 이라크는 약해진 이란을 얕봤고 1년 안에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독재정권을 뜨거운 혁명으로서 물리치고 이제야 온전한 이슬람주의의 마음에 드는 정권을 찾은 국민들의 저항은 엄청났다.

 

이란의 정규군 외에도 민병대, 혁명운동세력들 등의 끈질긴 저항으로 전쟁은 8년이나 계속되어야 했었고 이에 군사적, 경제적, 인적 피해는 어마어마했다. 그래서 당황한 이라크는, 휴전을 제의하나 이란은 거절하고 전쟁을 계속한다..

 

이란은 이 때 이라크에 비하면 왕따였다. 미국 뿐만아니라 근처의 많은 아랍국가들도 이란의 시아파 이슬람혁명의 영향이 자기나라에 미칠까 우려해 이라크를 지원하였다.

그래도 이란은 , 굴하지 않고 이라크를 지원하는 이들에게 단교조치로 맞불을 놨다. 전쟁할 자금이 부족한 건, 석유 가격을 무지 낮춰 판매하는 덤핑을 함으로써.. 충당했다 -> OPEC의 공시가보다 훨신 낮게 덤핑해서 OPEC의 산유국들과도 갈등을 빚었다.

 

이란이라크 전쟁은,

 

셀 수 없는(최소 백만여명..)인명피해는 물론이고 경제적 피해도 수천억 달러에 달했다.

 

이렇게 두 나라 사이의 전쟁이 길어진 이유는 이 전쟁이 사실 두 나라의 문제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모든 전쟁이 그렇듯 이 뒤엔 이들을 도왔던 미국, 소련 등 지원국가들이 있었다.

 

그래도 표면적 결과로 보면 이 전쟁은 강대국 미국의 도움을 받은 이라크의 승리였다.

 

그리고 , 이는 이라크를 중동지역의 군사 대국으로 만들어줬다. 그리고 이라크는 전쟁 끝난지가 얼마나 됐다고-_- 2년 후인 1990년, 쿠웨이트를 침공하고 그 유명한 걸프 전쟁을 일으킨다.

 

글이 너무 길어졌고 밤도 늦었으니

이후 내용은 다음 번에 포스팅하도록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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