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달 전, 김영하 작가의 '살인자의 기억법'이라는 제목의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면서
내내 이 영화가 개봉하기를 기다렸었는데- 어느새 또 시간이 흘러 9월이 오고, 기다렸던 영화를 볼 수 있게 되었다.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러했듯, 영화가 원작인 책을 살리기가 어려우니, 사실 큰 기대는 하고 보지 않았다.
좋아하는 배우 설경구씨의 연기를 볼 수 있다는 기대는 있었지만.
#줄거리.
'왕년'의 연쇄살인마 김병수(설경구 분)가 교통사고를 당하고나서부터 살인을 '은퇴'한다. 김병수에게 유일한 가족은 딸 은희(설현 분)와 누나. 김병수는 교통사고의 후유증인지 운명의 장난인지, 기억을 점점 잃게 되고 나중엔 자기자신마저 잃게 된다는 알츠하이머를 앓게 되는데.
딸 은희에게 자신이 살인마라고 믿는 민태주가 다가오고, 그녀 곁을 맴돌기 시작한다.
김병수는 그놈으로부터 은희를 지키기 위해 그를 죽여야겠다고 결심하고,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사라져가는 기억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민태주를 죽이기 위한 계획을 짠다..
이렇게 대략의 플롯은 원작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데 영화를 보면 볼수록 원작과의 차이점이 꽤 느껴진다.
#원작과 다른점
-병수와 누나, 그리고 딸 은희와의 관계설정 . 특히 영화 속 은희는, 엄청난 효녀로 나온다.
(원작에선 은희가 딸이라는게 병수의 망상이었다.)
- 수의사라는 병수의 직업
- 안소장(오달수 분)이라는 인물의 역할
- 원작에선 70대 노인이었던 병수가 영화에선 50대 -> 액션씬이 가능
- 병수의 과거 살인마시절의 살인 이유.
- 민태주(원작에선 박주태)를 보여주는 시점.
- 병수와 태주의 피튀기는 대결. 액션.
- 결말.
.
.
#역시 설경구
다른 배우들도 모두 훌륭한 연기력을 보여줬지만 그 중 군계일학은 , 역시 설경구.
영화를 보는 내내 설경구의 표정 하나하나에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치매를 앓으며 얼굴 반쪽은 경련을 일으키는 연기도 너무 자연스러워서 실제로 이런 병을 앓고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설경구씨는 작품 찍을 때마다 그 역할에 맞게 체중감소/증가를 사람 맞나 싶을 정도로 하시는데,
이번엔 정말 홀쭉해지셨다. 예전 역도산 때가 절로 생각이 났다. 뼛속까지 배우.
정말 극 초반부터 끝날때까지, 설경구씨의 표정변화 때문에 계속 소름이 돋아있었던 것 같다.
#소름끼치던 민태주, 김남길
영화에서 연쇄살인마 민태주의 직업은 경찰이다. 그래서 그는 동네에서 일어난 살인사건의 현장에 마음대로 출동할 수 있고
다른 사람들이 의심을 할 수 없게 만든다.
이렇게 온순해보이는 사람이 살인마.
정말 무서웠던 장면..은 딸 은희가 도망가는데 그걸 그냥 지켜만 보다 미친 속도로 뛰어가 붙잡는 것..
은희는 전속력으로 살기 위해 도망친 것이건만. 이를 우습게 따라잡은 남성의 물리적 우세.
너무 소름끼쳤다.
# 얼굴경련이라는 신호 연출
치매를 앓는 전직 연쇄살인마의 기억은 무서운 속도로, 희미해져간다.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잃기 때문에 병수가 태주의 정체를 눈치채고 그도 병수에게 악심을 품고 그의 딸 주변을 어슬렁거리게 되면서부터 영화의 호흡은 빨라진다. 이런 긴장감 속에서 병수의 깜빡거리는 기억력은 정말 안타깝고 답답하다. 사람이 기억을 잃는 걸 어떻게 영화에서 표현하고, 연기할 지 무척 궁금했었는데(자칫하면 혼란만 주거나 몰입에 방해될것이니.) 설경구의 얼굴경련 연기는 정말 소름이었다.
병수가 기억을 잃게 되는 타이밍에, 그의 얼굴 반쪽엔 경련이 일어나고 그 경련은 점점 빨라진다.
이걸 보고 관객은, 길을 잃어 헤매지 않을 수 있다.
#아쉬운 점
- 소설에선 병수의 1인칭 시점에서 오로지 글이 전개가 되기 때문에 병수의 내면적 갈등과 생각들, 그리고 그의 시점에서 본 상황들만을 볼 수 있기에- 좀 더 '관념적'이고 좀 더 긴장이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데 영화에선 이런 내적인 생각들을 어찌되었건 '화면'으로 보여줘야 하니, 상상하며 긴장할 수 있는 상황들을, 주인공의 내적갈등들을 다른 인물들과의 관계와 대립으로 바꾸어 '보여주며'- 복잡했던 캐릭터들이 좀더 단순해지는 느낌이었다.
- 또한 개인적으로 병수가 시를 배우러 수업을 다니며 혼자 생각하는 원작의 부분들이, 너무 유머화된 것 같아서 아쉬웠다. 시를 가르치는 선생님(이병준 분)과 함께 수업을 듣다가 병수에게 반하게 되는 조연주(황석정 분)에게 개그코드를 넣은 웃음을 유발하려 노력한 것 같은데 . 개인적으로 이 부분이 조금 아쉬웠다.
- 원작에서의 깔끔한 반전이, 영화에선 조금 늘어진 감이 없잖아 있다. a, b, c 장치의 연결고리를 '보여주기'위해 노력한 것 같은.
원작을 보지 않고 영화를 봤다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살인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원작 소설을 보고선 '기억과 망각'이라는 주제를 생각하게 되었다면
영화를 보면서는 '살인의 정당성'에 대한 것들을 생각하게 되었다.
소설 속의 병수는 단지 살인을 할 때 느껴지는 쾌감에 대한 아쉬움-으로 연쇄살인을 저질렀었다.
그런데 영화 속 병수는 이 세상속에 존재할 가치가 없는 쓰레기만도 못한 것들을 '청소'한다는 의미에서 살인을 했다.
그의 첫 살인 희생자는 그와 가족을 상습폭행하던 아버지였다. 아버지에게 폭행당하던 병수는 충동적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두려움에 떨게 되나, 이후 가정에 찾아온 평화를 느끼고 생각한다. 세상엔 꼭 필요한 살인도 있다고.
병수가 자신의 살인을 그렇게 정당화하며 영화는 동력을 얻는다.
병수는 태주를 , 자신은 이유가 있어서 사람을 죽였지만 너는 그런 이유도 없이 무고한 사람들을 죽였다며 비난하지만
태주는 냉소를 지으며 말한다.
어쨌든 죽이고 싶은 사람을 판단한 건 당신 아니냐고. 나도 내가 죽이고 싶은 사람을 죽이는 것 뿐이라고. 뭐가 다르냐고.
이 작품에서 뿐만 아니라, 미드 덱스터,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 피터스완슨의 죽여 마땅한 사람들.
등 책이나 영화, 드라마 속 많은 작품에서도 던지는 질문이다.
살인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
죽어도 싼 쓰레기같은 사람들은 , 사회에 악영향만 끼치는 사람들은 차라리 없어지는게 낫지 않은가.
그 한사람을 죽임으로써, 그사람 때문에 죽었던 사람들을 위로하고 앞으로 죽을 수도 있을 사람들을 보호할 수 있지 않는가,
하는.
이건 개인적인 질문일 뿐만이 아니라, 국가적 고민이기도 하다. 사형제도의 폐지 or 부활.
개인적으로 나는 한 사람을 죽이고 말고를 결정하는 건 사람이 해선 안 된다고 생각하는데,
만약 그 사람이 테러리스트나 사이코패스에 연쇄살인마라, 가만히 놔두면 더 큰 사람들의 목숨이 위험하다는 상황에서는,
죽여 마땅한 것 같은 사람들에게는 편안한 죽음보다는 (아마 그들은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을 것 같다.)
사육당하는 A4용지크기의 케이지에 같인 닭들처럼 몸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그런 좁은 우리 속에 갇혀 평생을 지냈으면 좋겠다.
사형이라는, 길어봤자 몇 분인 그런 죽음을 그런 쓰레기들에게 주는 건 너무 무르고 무른 처벌같다고 생각했다.
차라리 죽는게 낫겠다 싶은 삶을 살게 하고 싶다..
그렇지만- 경찰, 검찰 시스템이 잔뜩 썩어버린 대한민국에선,
솜방망이 처벌로 인해 가해자보다 희생자와 그 가족들이 고통을 받게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 가해자가 내 소중한 사람을 죽였는데 그런 상황이라면?
그 가해자, 내 손으로 직접 죽이러 가지 않을까- 싶다.
그래서 나는 아직 살인의 정당화.? 라는 논제, 너무 어렵다.
#태주는 누구일까?
태주는 병수와는 대립하며 긴장감을 높이다가 결국엔 죽는다. 아니, 죽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영화 마지막, 터널 씬에는 병수가 나오는데 늘 지니던 목걸이(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딸의 사진을 걸고 다니던) 속엔
딸의 사진이 아니라 태주의 사진이 있다.
여기서 멍해졌는데. 왜? 죽인 사람의 사진을 굳이 왜 걸고 다닐 이유가 있을까?
해석의 여지가 있겠지만,
병수가 본, 딸을 죽이려는 태주는 아마 병수 자신이 그려낸 망상이 아니었을까 싶다. 자신의 젊은 날의 모습.
알츠하이머로 기억을 잃어가면서 , 기억이 병들어가면서 보게 된 허상.
만약 태주가 정말 그 살인마 태주였다면 병수가 늘 늘 기억을 기록하기 위해 갖고 다니던 녹음기에 그의 목소리가 있었을 것이고 이를 확인한 경찰에게 결정적 증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병원(정신병원으로 보임)에 찾아온 검사는 병수에게 왜 경찰을 죽였냐고 물었다.
이 말은, 녹음기에, 태주 목소리가 없었다는 것일 터. (병수는 이 녹음기에, 태주가 살인자라는 증거가 담긴 그의 목소리를 녹음했다고 생각했었다.)
네 기억을 믿지 마라.
라는 메세지를 영화는 처음부터 끝까지 던져주고 간다.
# 김병수, 민태주- 두 살인자의 공통점
김병수와 민태주 이 두 살인자의 공통점은 (둘을 다른 사람으로 가정했을 때)
둘 다 부모로부터 큰 상처를 입은 어린시절을 갖고 있다는 것.
김병수는 아버지로부터 끔찍한 폭행을 당해왔었고, 민태주는 어머니로부터 학대를 당하며 머리가 뜯어져나가기도 했었다.
가정폭력이 키워낸 살인마.
가혹한 폭력과 학대를 당했다는 것이 이들의 이어지는 살인행위를 절대 정당화시킬 수도, 명분을 줄 수도 없지만서도.
건강한 가정의 중요성을 일깨워준다.
#살인자 김병수의 부성애
김병수는 자신의 친아버지에게 끔찍한 폭력을 당하며 살아오다가 충동적으로 아버지를 죽이고 살인자의 길로 들어섰다고 했었다.
그런데 그런 김병수도, 자신의 딸에게는 무뚝뚝한 것 같으면서도 따뜻한 그만의 부성애를 보인다.
영화를 보며 가장 마음을 울렸던 말이 기억난다.
김병수가, 딸을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희생해가며 민태주를 죽이고 , 피범벅이 된 상태로 공포와 두려움에 가득 찬 딸을 보며 말한다.
'너는 내 친딸이 아니니 살인자의 딸이 아니다. 걱정하지 마라. 우리는 친부녀지간이 아니니, 너에겐 살인자의 피가 섞이지 않았다.'
살인을 저지르고나서도 후회하지 않을만큼 악마같았던 자신의 아버지의 피가 자신에게 흐른다는 것에 얼마나 진저리를 치며 살았을지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관계가 그 사람에게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느끼게 해주는 영화였다.
사람을 아프게하는 것도 사람이며,
그 사람을 치료하는 것도 결국 사람인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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