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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자

6.25전쟁/한국전쟁 배경,원인 및 결과.

by Boribori:3 2017. 6. 25.

돌아가신 할아버지께서 늘 6.25전쟁 참전경험에 대해 입이 닳도록 이야기해주시곤 하셨다. 어릴 적엔 하도 많이 들어 지루하다고 생각했었는데, 할아버지 돌아가시고 나선 자주 해주셨던 이 전쟁에 대해 더욱 생각하곤 한다.

 오늘은 할아버지 생각이 더욱 많이 나는 날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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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6.25 한국전쟁 67주년 되는 날.


<요약>

 

기간: 1950.06.25- 1953.07.27

누가:  남한, 미국, 영국 vs 북한, 중국, 소련

결과: 1953년 휴전협정, 사망자 150만명 이상, 부상자 360만명 이상, 남북 관계 극악화.

 

 

한국 전쟁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그 시대 가장 강력한 군사력을 가진 반공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의 냉전적인 갈등이 열전으로 전환된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국제연합군, 소련, 중화인민공화국 등 많은 국가들이 참전한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국제전이다.


*냉전: 영어로는 Cold war로, 무기를 들고 싸운다는 열전(hot war)과 반대되는 의미.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 갈등/대립 구조를 말한다.


<배경>

1945년 8월 15일은 제2차세계대전이 일본의 항복으로 종결된 날이자, 한국이 일본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광복절이다. 그러나 기쁨도 잠시, 한반도는 미군, 소련군의 통치 하에  38도선을 기준으로 남과 북으로 나뉘고 만다. 일본이 항복했음에도 소련이 물러나지 않고, 청진시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계속하자, 미국은 소련이 한반도를 점령할 수도 있겠다고 우려하여, 역시 물러나지 않고 한반도의 남쪽에 계속 주둔한다. (소련:공산, 미국: 반공)


두 국가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물러날 줄 알았던 우리에게는 큰 충격이었겠다.

 제 2차세계대전 때 일본에 맞서 연합하여 함께 싸우던 미국과 소련은, 일본의 항복 뒤로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는 적이 되고 만다.  이렇게 미국과 소련이 한반도 내에서 자신들의 영향력을 내세우고, 한민족이었던 북한과 남한은 각각의 정부를 수립하며 분단된다.



사진출처:위키피디아



<한국전쟁 시작>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남침으로 사흘만에 서울이 북한군에게 점령되었다. (1950.06.29 서울 점령됨)

 북한은 전쟁 시작 두 달 만에 경상도 몇 몇 지역 외의 대부분의 남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이는 그동안 38도선 근처에서 종종 발생하였던 작은 충돌, 갈등이 아니라 북한군의 전면적인 공격이었다.

 

북한은 중국과 소련의 지원으로 남한보다 크게 군사력에서 앞서있던 상태였고, 전쟁 준비가 안되어있던 남한을

선전포고도 없이  공격하였던 것이다.

 

소련의 지원을 받고 선전하는 북한을 미국이 그냥 놔둘리 없다.

이후, 미국을 주축으로 16개국이 참여한 국제연합군이 남한을 지원해주기 시작하였다.

(1950.09.15: 인천상륙작전->서울 탈환),그들의 지원에 힘입어 우리나라는 치고 올라가 북한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하였다.


(출처: 네이버)


북한이 다시 밀리자, 같은 공산국가인 중국은 위협을 느꼈다.  중국은 이에 본격적으로 개입하기 시작한다. (1950.10.25~)

.  중공군의 개입으로 1년만에 전세는 원상복귀 되었고.. 이렇게 밀고 밀리는 전쟁은 3년 동안이나 계속되었다.

그러다 휴전회담이 시작된건 53년 7월.  유엔군과 북한군 사이엔 휴전에 대한 제안, 회담이 시작되고..

1953. 07. 27. 휴전협정이 체결되고 6.25전쟁은 종결된다.

 

<결과>

그리고.. 모두들 전쟁으로 인해 지쳐갔으며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승리는 힘들다는데 동의하고, 휴전협정을 하였다. (1953년 7월 27일)

이 3년의 전쟁은 남과 북에게 돌이킬 수 없는 큰 흉터를 남겼다.

 

전쟁이 길어지며 수많은 젊은이들이 군대에 동원되었고 가족들은 흩어졌다. 많은 이들이 죽고, 많은 아이들은 부모를 잃고 고아가 되었다. 건물들은 부서졌으며 황폐화된 농지들은 물론. 500만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고 부상당했으며, 1,00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가족과 헤어져 뿔뿔이 흩어졌다. 이 때 헤어져 약 60년이 지난 지금까지 38도선을 넘지 못해, 만나지 못하는 수많은 안타까운 이산 가족들이 있다. 참 안타깝고 슬픈 일이다.

 

인적, 물적 피해뿐만 아니라, 서로에 대한 적대감이 심해져 우리나라는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반공 정서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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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 참전국>

군대 지원: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미국, 캐나다, 필리핀, 태국, 뉴질랜드, 호주, 콜롬비아, 남아프리카공화국, 에티오피아, 터키, 그리스 16개국


의료 지원: 스웨덴, 인도, 덴마크, 노르웨이, 이탈리아 5개국.


물자 지원: 참전국과 의료지원국을 제외하고 에콰도르, 베네수엘라, 우루과이, 페루, 파라과이, 파키스탄, 브라질 · 타이완(대만) , 쿠바, 아이슬란드, 레바논, 멕시코, 니카라과 등 많은 국가들과 이외에도 다수의 국제기구가 물자지원에 참여하였습니다. 

한국전쟁 당시 시대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이므로 많은 나라들도 경제적, 정신적 등 여러 면에서 힘든 상황이었다. 우리나라는 이들의 도움으로 전쟁의 아픔 속에서 점차 회복해나갈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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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많고 탈도 많은 지금의 대한민국 사회이지만 적어도 생명의 위협은 느끼지 않을 수 있는 건 국가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신 많은 분들의 희생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분들께 감사하는 마음을 표한다. 그리고 다시는 이와 같은 전쟁이 일어나서는 안될 것이다.


전쟁은 짧아도 그것이 남긴 상처는 없어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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