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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여름 가을 겨울69

있을 때 잘한다는 것. 할머니와 함께 걸으려면 내 평소 걸음걸이보다 4배는 더 천천히 걸어야한다. 계단. 계단이 있으면 한걸음, 내딛고 잠시 쉬다 또 한걸음. 계단 한칸한칸을 연이어 걸을 수 없다. 내리막길. 할머니는 조금(정말 조금이었다) 경사가 진 내리막길로 가는 걸 피하시고 빙 돌아가야하는 그나마 경사가 덜 진 길로 걸어가셨다. 종종 걷던 길이나 걸음이 느리신 할머니의 손을 잡고 천천히 한걸음 두걸음 걸으니 그동안 전혀 의식하지 못했던 경사진 내리막길, 경사진 계단길이 장애물로 보였다. . . 정류장에 도착하자 곧 셔틀버스가 왔다. 혼자 걸었더라면 5분도 채 걸리지 않았을 그 짧은 거리가 할머니의 걸음걸이에 맞춰 걸으니 험하고 길게 느껴졌다. 할머닌 버스에 오르는 것도 느리셨다. 내 손을 꼬옥 쥐고 한 걸음 한 걸음. 할.. 2017. 11. 13.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 자연이 주는 감동이 있다. 도시의 화려함이 주는 감동과는 다른 차원의. 오늘은 유난히도 날이 맑고 푸른 날이었다. 평상시엔 미세먼지에 가려져 잘 보이지 않던 자연의 반짝임이 선명하게 다가왔다. 어딘가로 멀리 여행을 떠난 것도 아니었다. 매일같이 지나치던 출퇴근길 풍경. 햇살에 반사되며 반짝거리는 잔잔한 강물, 반짝거리며 제각기의 녹음을 뽐내는, 바람과 햇살에 찰랑이는 나뭇잎들. 찰랑거리는 나뭇잎에서는, 맑고 경쾌하고 아주 높은 음의 실로폰의 연이은 소리가 나는 것 같았다. 포실포실한 흰꽃을 피운 가르릉거리는 억새풀들. 바람결에 나풀나풀 춤을 추는데, 왜 그러지. 가슴이 두근거리고 눈물이 났다. 이 아름다움에. 무슨 좋은일이나 슬픈일이 있어서 특별히 어떤 감정상태에 있었던것도 아니고 순수한 - 아름다움에 .. 2017. 11. 2.
호르몬의 노예. 달이 차고 기울고 다시 찬다. 그리고, 잊지 않고 찾아오는 반갑지 않은 존재도 함께 다가온다. 달의 기운을 받는 건가. 생리 예정일이 다가오기 시작하면 신경이 조금씩 예민해지기 시작한다. 아랫배가 묵직해지고 식욕이 별로 없어지며 뭘 별로 먹지 않아도 배가 그득하고 가스가 차는 느낌이다. 가슴은 점점 붓기 시작해 살짝 누르기만 해도 아프다. 이유 없이/ 아니, 아주 사소한 일에도 우울해지고 슬퍼지고 . 그러다 생리가 시작되면, 이 생리 전 미미했던 증조들은 갑자기 증폭. 묵직하고 아래로 땡기는 느낌이었던 자궁은 , 무엇이 그리 불만인지, 이리저리 뒤틀리고 경련을 일으킨다. 생리 전엔 너무 조용해서 존재 자체를 잊고 지냈던 이 자궁이, 조용하지만 시끄러운 비명을 지르며 정확히 자신의 위치를 알리며 존재감을 .. 2017. 10. 29.
대도시, 군중 속 외로움. 2017년 추석.오늘 하루는, 친구들도- 가족들도- 아무도 만나지 않고 24시간, 혼자 보냈다. 왠지, 그러고 싶었다.서울. 이 찬란하고 화려한 대도시에서.친구들과 함께 걸었던 거리를 혼자 걸으니, 그 거리를 채우는 사람들이 보였다. 수많은 사람들 속에 있다 보면, 혼자라는 사실이 더욱 선명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곧, 외로움이 찾아온다. .. 신은 자연을 만들었지만 인간은 자연을 개조해 도시를 만들었다. 도시 전역을 잇는 촘촘한 그물망 같은 지하철과 버스 노선들. 적막하고 깜깜했던 밤을 찬란하고 화려한 야경이 있는, 북적거리는 공간으로 만들어낸 더욱 촘촘한 전선들. 도시 전체가 보이지 않는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다.신조어를 포함한 수많은 단어가 실려있지만 '느림'과 '쉼'이라는 단어는 빠져있는 것 .. 2017. 10. 4.
10년전의 나와 지금의 나 고등학교 때 무지 친하게 지내던 친구 두명이 있다. 그 때부터 친구였으니, 벌써 10년지기가 된 것이다. 고등학교는 슬로우시티에 소재된 논과 밭으로 둘러쌓인, 자연친화적 기숙사고등학교였다. 공부만 시키던, 기숙사 생활을 견디지 못한 내가 담임선생님과도 엄청 싸워가면서도, 가장 먼저 뛰쳐나와 당시 자취생 1호가 되었고, 이후 이 두명은 2, 3호가 되었다. 학교도 같고 우리 셋 다 유일하게 학교 내에서 자취를 했으니, 야자가 끝나고 가로등이 희미한 골목길도 같이 다니고. 기숙사 친구들은 야자 후에도 또 기숙사에 딸린 별관에서 공부를 해야할 때 우린 자유롭게 귀가하고. 지금 생각하면 참 그게 뭐가 그리 즐겁고 행복했었나, 별거 아닌 것 같게 느껴지지만, 당시에는 그 작은 자유가 너무나도 즐거웠었다. 짧고도 .. 2017. 4.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