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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 많은 밤과 새벽.

싫다고 말하는 용기. 할말은 하고 살자

by Boribori:3 2021. 7. 25.

당시엔 선명하고 또렷했던 그때의 장면들, 감정들도 세월이 지날수록 서서히 흐릿해지지만 시간이 지나도 잊혀지지 않는 기억들이 있다.

내게도 10년이 넘게 흘렀어도 어제 일처럼 생생한 기억이 있다. 좋지 못한 기억.  잊고싶은 , 그러나 잊혀지지 않는 후회만 남는 기억. 

막 수능이 끝나고, 친구들과 그동안 하고싶었지만 공부를 위해 참았던 이것저것들을 하며 세상 누구보다 신이 났었던 열아홉살 끝 언저리 즈음였다.   이전부터 배워보고 싶었던 특공무술을 가르치는 도장에 등록했었고 비가오나 눈이오나 누구보다 열심히, 재밌게 열정적으로 다녔었던 것 같다. 그리고 12월 어느날 밤,  도장 사람들과 함께 송년회 회식자리를 함께 했다. 그리고 2차로 간 노래방에선 내 옆에 그 도장 관장이 앉았었다. 시간이 늦어 잠이 왔던 나는 노래부르고 춤추는 사람들의 흥에 끼지 못하고 졸았다. 그런데 누군가 허벅지를 만지는 불쾌감에 잠이 확 깼고 너무 놀라서 심장이 밖으로 뛰쳐나갈듯 쿵쾅거렸다. 옆에 앉은 관장의 손이었다. 어둡기도 했고, 테이블에 가려져 가뜩이나 노느라 바쁜 다른 사람 눈에는 보일리 없는 사각지대였다.  스치듯 잘못 만진 것도 아니고 , 슬슬 쓰다듬다가 멈췄다가가 반복되었으니 내 착각일리도 없었다. 그 순간 정말 오만가지 생각이 교차되었다. 당장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이게 뭐하는 짓이냐며, 스무살도 안된 여자회원의  다리를 만지작대는 이 인간에게 무안을 줘야할까? 그럼 지금 이 흥겨운 자리는 내가 말하는 순간 파토가 나겠지? 모두의 시선은 나에게 쏠릴 것이고, 그런데 관장이 자긴 그런 적 없다고 하면?  내 말을 믿어줄까? 그냥 내 다리를 만지고 있는 이 인간의 손만 뿌리칠까? 어떡하지? 왜 나는 이런 상황에 아무것도 못해서, 계속 만지고 있도록 놔두고 있는거지?  제자를 만질 정도로 취해서 실수하는 건가? 아니. 취하고 말고가 나한테 무슨 의미가 있지? 왜 나는 여기 무릎 위로 올라오는 치마를 입고 온거지?  이래서 밤늦게 돌아다니지 말라고 하는건가? 지금 생각하면 너무 웃긴 별의별 생각들.

가끔 화를 내고 싸울 줄도 알아야 한다.

평상시 성추행을 당하면 어떻게 행동해야 한다는 건 , 학교나 가정에서의 교육을 통해 잘 알고 있었지만. 처음 겪는 그 상황이 막상 실제로 닥치니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당하면 오히려 대처하기 쉬웠을 것 같은데 잘 알고있는 사람이, 그것도 나를 지도하던 선생이 그러니 충격이 너무 커, 몸이 얼어붙었다. 그 자리에 함께했던 사람들 대부분이 그 관장의 오래된 제자였기에 더 충격이었다.

결국 난 내 허벅지를 어루만지던 그 사람의 손을 피하기 위해,  화장실에 가겠다고 하며 그 자리에서 나왔고-  피곤하니 먼저 가겠다고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 한명에게 문자를 남기고 집에 갔다. 그리고 그렇게 아무런 대응도 하지 못한 채 오히려 추행을 당했던 피해자인 내가 그 도장을 그만두었다. 경찰에 신고를 할까,도 많이 생각해봤지만 그러기엔 아무런 증거가 없었고 아내랑 아이가 있는 사람인데  다리 한번 만졌다고 소동을 피우기도 고민됐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태까지 운동을 재밌게 가르쳐 내가 잘 따르던 유쾌했던 사람이었다고 생각하니 내적 갈등이 심했다. 당시 술이라는  게 취하면 어떤 느낌인지도 잘 알지 못했던 순진했던 10대의 나는 술에 취한 남자는 다 늑대니 여자가 조심해야 한다- 따위의, 자라면서 수없이 들었던 말들을 떠올리며 어느 정도 나에게도 조금은 잘못이 있었다고 생각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고 뒤돌아보니 그때의 내가 정말 어이가 없고 미련하게 느껴졌다. 그런 내 행동이 그 사람이 그렇게 행동해도 괜찮다는 거지같은 마음에 +1을 시켜줘,  혹여나 생길지 모르는 피해자 양산에 기여했을 수도 있는데.  본격적으로 '후회'를 시작했을 땐 이미 많이 늦어버렸을 때였다.  그리고 앞으로 이런 비슷한 일이 혹시라도 생기면 지금처럼 후회할일 만들지 말고 그 자리에서 즉시 표현을 해야겠다고 다짐했었다. 

단호박이 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렇게 11년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11년만에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상대는 술에 취한 지인. 

집으로 가는 차 안. 대리기사와 뒷자리의  나와 그. 이렇게 세명이었다.  절대 이럴거라곤 상상조차 되지 않는 사람이 다리를 만지니,   또 엄청난 충격으로 몸이 얼어붙었다. 이건 무슨 거지같은 상황이지. 술에 아무리 취했다 하더라도 이럴수가 있나? 손을 뿌리치고, 창문쪽으로 몸을 기울이기만 했지, 또... 별다른 대응을 하지 못했다. 그사람 쪽을 쳐다보지도 못했다. 심장이 미친듯이 쿵쿵대고 화가 나는데 또 아무것도 못하고 있는 나. 그러다 그의 집 근처에 도착했고 그는 중간에 내렸다.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차안. 하염없이 눈물이 났다. 또 꼼짝도 못하고 있던 내 자신한테 너무 화가 나서. 열아홉때 바보같이 아무것도 못했던 과거의 나는, 너무 어리고 여려서 그랬던 거라고 생각했고 그렇게 합리화했었다. 

가끔 가시를 세울 줄도 알아야 한다.

벌써 서른이 넘은 지금까지 별의별 사람들 많이 만나고 부딪히며 그래도 나름 당당하게, 할말은 하며 살아왔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이렇게 또 넘어가버리면.. 앞으로 내 자신을 너무 미워할 것 같았다 . 

그리고 다음날 아침. 용기를 내어, 그에게 어제 밤 이런 일이 있었다고 , 기억 하시냐고- 만나서 직접 사과를 받고 싶다고 문자를 보냈다. 그는 다행히, 모르는 척 그런적 없다며 내빼지 않았고 바로 나와 있었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했고 사과를 했다.  물론 술에 취해 잘 기억은 나지 않는다고 했다. 그래도 내 감정을 상하게 했던 , 나에게 잘못을 한 상대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 전엔 혼자 생각만 하고 자책했던 것들을 다 꺼내 이야기하니   그렇게 속이 후련할 수 없었다. 한 발자국 성장한 느낌. 

발목을 잡고있던 그 사슬을 끊어낸 기분이었다. 표현을 하지 않았다면 또 혼자 속으로만 끙끙 앓으며 그때보다 훨씬 더  후회하며 살았을 텐데 .

 

그 현장에서 바로 대응해야 했던 게 맞지만 그래도 늦게라도 용기를 내 할말 하고 사과를 받은 나 자신이 너무 대견하다. :) 

가끔은 토리가 나보다 낫다~

   할말은 하고 살자!  싫은 건 싫다고, 옳지 못한 건 아니라고. 

생각보다 어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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