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와 같은 민주주의는 그냥 , 저절로 있게 된 것이 아닙니다. 대한민국의 민주화를 위해 목숨을 위협하는 폭압에도 굴복하지 않고, 끝까지 투쟁하신 많은 국민들의 피비린내 나는 희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전남도청 앞 광장 분수대를 중심으로 2만 여명의 시민과 학생들이 모여 ‘민족민주화대성회’를
열고 대대적인 횃불행진을 벌임. 사진출처: 5.18기념재단)
<요약>
언제: 1980년 5월 18일 - 1980년 5월 27일
누가: 전남, 광주 시민들이
내용: 계엄령 철폐, 전두환 및 12.12사태를 주도한 신군부 퇴진 등을 요구하며 벌인 죽음을 무릅쓰고 펼친 역사적인 민주화운동.
<배경>
1963~1979년까지 대한민국의 5-9대 대통령을 지내오던(무려 18년간 독재정치..)
박정희 전 대통령이 암살당한 1979년 10월 26일, 같은해 2달도 채 지나지 않아 12·12사태가 일어납니다..
*12·12사태: 1979년 12월 12일, 전두환, 노태우 등의 신군부세력이 박정희가 사망한 후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군사반란을 일으키고 무력으로 군부를 장악합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대한민국은 또다시 12년간의 군부독재 속으로 빨려들어갑니다. 18년 독재를 했던 박정희의 사망 후 민주주의를 기대했던 국민들의 바람이 꺾이게 된 것이죠.
전두환이 대통령이 되고, 화가 난 시민들은 민주주의를 원한다는 시위를 시작하고, 이에 전두환은. 이러한 사회혼란을 억압해야 한다며 비상계엄을 선포합니다.
<과정>
박정희 정권의 유신체제에 이어, 민주화가 일어나는가 싶더니, 다시 군부독재정권이라니. 국민들은 분노, 또 분노하였습니다. 화난 국민들의 저항운동은 전국적으로 확대되었고 전국 학생들은 1980년, 5월 15일, 서울역에서 모여 민주항쟁 시위를 하였습니다. 신군부는 이 때를 빌미로 삼아 이틀 후인 5월 17일, 비상계엄령*을 전국으로.. 확대하였습니다. 전라도 광주 역시, 비상계엄군의 억압과 횡포로 가득했습니다.
( 민족민주화대성회 참석을 위해 교문을 벗어나 금남로로 향하고 있는 전남대학교 교수들, 사진출처: 5.18기념재단)
(사진: 학교정문에서 전경과 대치하고 있는 전남대생들, 출처: 5.18 기념재단)
......
"...5월 18일 계엄군은 전남대학교 정문 앞에서 등교를 하는 학생들을 막아 세웠다. 이에 학생들이 거세게 항의하자 계엄군은 진압봉을 앞세워 학생들을 구타하고 연행하기 시작했다. 이를 만류하려던 시민까지도 폭행을 당했다. 등교하지 못한 학생들은 이런 계엄군의 폭력을 알리기 위해 전남도청으로 진출했다. 소식을 전해 듣게 된 사람들도 하나둘, 도청으로 몰려들었다. 이때만 해도 시민은 소극적이었고, 조직화되지 않았다.
이후 계엄군은 조금이라도 사람이 모이면 해산하라는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계엄군의 진압봉은 경찰의 진압봉과는 다른 형태로, 구타를 당한 시민은 심각한 부상을 입었다. 계엄군의 잔인함에 분노한 시민이 계엄군의 의도와는 달리 거세지고 집단화되자, 계엄사령부는 광주지역의 통행금지 시간을 저녁 7시로 조정했다. ..." - 출처: 5.18기념재단
비상계엄군들은 저항하는 학생들을 구타하며, 각 대학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에 전남대학교 학생들의 분노는 폭발하였고 시위를 시작하였습니다.
*계엄령: 대통령의 고유 권한으로, 국가 비상사태시 국가 안녕과 공공질서 유지를 위해 군사권을 발동하여 병력을 이용해 치안을 유지할 수 있는 국가긴급명령.
이에 계엄군들은 시위하는 학생들을 무력으로, 총칼로 진압하였고, 그들의 폭력으로 인해 부상은 물론, 죽임을 당한 학생들도 많았습니다. 계엄군들은 피신하는 학생들은 추격해 구타, 사살하며, 이들을 숨겨주는 민간인들 역시 학살하였습니다..
<결과>
1980년 5월 27일까지 약 10일동안의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약 2만 5천 명의 군인들이 동원된 무력 폭력진압으로, 사망 191명, 부상자 852명을 냈습니다. (정부 공식발표..) 이렇게 많은 희생을 남겼음에도 광주민주화운동은 계엄군들의 진압으로 실패로 끝났습니다..
5월 18일 당일에는 수백명의 무고한 시민들이 끌려갔으며 이들 중 신군부 세력들에게 폭행당해 중태에 빠진 이들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날 저녁.. TV에선 그러한 광주의 끔찍한 상황에 대해서는 한마디 언급조차 없었습니다. 알면서도 모르는 척 했었던 것입니다.
계엄군들에 의해 진압된 이 민주화 운동은, 이후 신군부와 관련 언론 등에 의하여 ‘광주사태’ 또는 ‘북한의 사주에 의해 광주폭동’ 등으로 매도되었습니다.
자유를 위한, 독재에 맞선 시민들의 민주화 운동은 이렇게 폭도들의 반란한 사태로 왜곡보도 되었습니다..
그러나 진상규명을 위한 끈질긴 투쟁으로 관련 희생자들은 민주화 유공자로, 현재의 명칭인 ‘5 · 18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명예를 회복하였습니다.
5.18광주민주화운동은 대한민국 민주화의 디딤돌이 되었으며 이후의 민주 항쟁들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의의>
"5월 27일 새벽, 광주 도심 곳곳에서는 ‘계엄군이 쳐들어오고 있습니다. 시민 여러분! 우리를 잊지 말아 주십시오’라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 소리는 오래도록 광주 시민의 뇌리에 남아 5·18민주화운동의 정신을 잇겠다는 의지와 열정을 갖게 만들었다. 도청을 사수해 버티기 어려울 것임을 누구나 알았지만, 많은 시민군이 도청에 남아있었다. 새벽 4시경, 계엄군은 다시 도청을 향했다. 교전 시간은 1시간 남짓에 불과했고, 윤상원을 비롯한 많은 시민군이 시신으로 남겨졌다. 이날 전남도청에서 얼마나 많은 사람이 머물렀고,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죽었는지 아직까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당시 생명을 잃었던 많은 이들이 지금, 망월동 시립묘지 제3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5·18민주화운동은 이후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전개된 민주화운동의 원동력이 되었고, 군부독재에 결정적 타격을 가한 87년 6월 항쟁의 밑거름이 되었다. 5·18민주화운동은 95년 5·18특별법으로 제정되었으며, 전직대통령이었던 전두환, 노태우 등 92명이 내란·내란목적살인죄 등으로 처벌받기까지 전 국민의 염원이 모여 5·18민주화운동 정신계승으로 이어졌다. 5·18민주화운동으로부터 87년 6월 항쟁에 이르기까지, 광주를 비롯한 전 국민이 보인 저항과 참여, 연대의식은 오늘날 세계 곳곳에 중요한 민주화운동 사례로 알려지고 있다. 이러한 중요성을 인정받아 2011년 5·18민주화운동 관련 자료들은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 출처: 5.18기념재단
5.18광주민주화 운동은,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우리 민족들의 뜨거운 목소리를 전세계에 알리게 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현재의 대한민국이 있기까지는, 이 분들의 희생이 없었으면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사진: 1980년 5월 29일 망월동에서 진행된 129구의 장례식, 출처: 5.18 기념재단)
이렇게 힘겹게 일궈낸 민주주의는 언제 다시 빼앗길 지 모릅니다. 사실 이미 빼앗기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정부가 하는대로 가만히 보고만 있는다면, 아무것도 바뀌는 것은 없을 것입니다.
'민주주의'는 국민이 참여해야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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