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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알자

고문기술가 이근안은 누구? "나는 애국자다"

by Boribori:3 2018. 1. 9.

이근안은 경찰이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사람들을 기발한 방법으로 고문수사하며 강제진술을 하게 함으로써 고문기술자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후에 문제가 되자 공소시효가 끝나길 기다리며 도피생활을 하다 시효가 늘어나자 자수하고 징역을 살다 나와 목사가 되었던 사람이다.

 

 

#이근안 생애 요약

1938년, 일제강점기에 출생.

1958~1962년, 대한민국 공군 복무

1970년, 대한민국 경찰 순경에 임용됨

1970년대 후반~1988, 대공/방첩/살인사건/강력계 수사담당관 (범인검거에 공이 많아 고속승진)

1988년, 군사정권 붕괴 -> 불법체포 및 고문수사 혐의로 수배 후 경찰서 사직이후 10년간 도피생활

1999년 검찰에 자수 후 구속. -> 징역 7년 선고받음

2006년, 출소

2008년~2012년  개신교(대한예수교장로회) 목사로 활동하다 설교 중 망언 등으로 목사자격 박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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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안, 경찰입문.

이근안은 순경이 되고나서 거의 곧바로 당시 대공분실장이었던 박처원의 경호원으로 채택되었다.

 

#박처원은 누구?

박처원은, 요즘 인기있는 영화 1987(손꼽히는 인생영화, 정말 꼭 봤으면 하는 영화..)에서 배우 김윤석이 연기한 당시 치안감으로 활약했던 사람이다.

그는 북한에서 태어나 광복 후 월남을 하고 1947년, 경찰이 되고.'빨갱이'들과 민주화운동을 하는 시민들을 잡아 고문한 뒤 강제진술을 받아내 수사를 조작했던 사람이다.

 

#박처원의 분신, 이근안

무튼 이렇게 만난 이근안과 박처원은, 점점 깊은 관계를 쌓고 .. 이근안은 박처원의 지원으로 화려한 범인검거 능력을 배웠는지 많은 경력을 쌓고 초고속승진을 하게된다.

 

#범인검거능력=고문기술능력

이근안의 범인검거 능력은 반인륜적인, 고문을 행하는 고문기술능력과 상통했다.

물고문, 전기고문, 손톱고문, 요도에 볼펜심을 꽂는 고문 등 온갖 고문을 직접 행하였고, 이에 그치지 않고 고문기계를 개발하여 새로운 수법의 고문기술을 행하였다고 , 그에게 고문을 당했던 사람들이 증언하였다.

 

#민주화운동의 꽃, 김근태 전 민주통합당 삼임고문 고문주도

 

                             (사진출처-영화 남영동 1985 中)

김근태는 1985년, 민주화운동을 하다 붙잡혀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22일 동안 이근안에게 가혹한 고문을 받았으나 살아남아 1988년 석방되어 고문수사의 진상을 폭로했고,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이하 전민련)결성을 주도한 인물이다.

위에서 언급한 박처원 치안감은 자신이 아끼는 분신 이근안에게 김근태가 입을 열도록 수사를 지시했다.

 김근태는 이후에도 꾸준히 민주화운동을 했고 정치를 했는데 고문후유증은 평생 그를 떠나지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2011년 12월, 고문후유증을 앓던 그는 결국,  파킨슨병과 패혈증 등 합병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따라서 이근안의 악명이 널리 알려진건, 이렇게 고문수사로도 살아남아 공직자로 일했던 김근태와, 그의 아내 역할이 매우 컸다고 볼 수 있다..  아내 인재근은 당시 공권력을 이용한 반인륜적인 고문 행위를 인권단체와 미국언론에 폭로하여 전세계적으로 알렸다.

                              (고 김근태 민주통합당 상임고문.   사진출처-오마이뉴스)

 

..김근태의 빈소에 이근안은 낯짝을 내비치지조차 않았다.

 

#1987년 1월, 박종철군 고문치사

김근태는 남영동에서 고문을 받은지 약 1년이 지난 1986년, 고문수사의 진상을 폭로하고자 고발장을 쓴다.

그러나 이 고발장에 의해 이루어진 수사는 증거없음으로 1년만에(1987.01.06) 무혐의 처분이 되었다.

이에 이근안을 비롯한 고문수사관들은 더욱 기세등등했을 것이다.

그리고.. 약 일주일 후, 박종철군은 21세의 꽃다운 나이에, 같은 공간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고문수사에 의해 사망한다.

                 (박종철군이 물고문을 당하다 숨진 대공분실 509호. 사진출처- 한겨레)

제대로, 공정하게 수사를 했더라면 - 박종철군은 지금까지 살아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대학생 박종철군의 죽음은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은 서서히 무너지기 시작한다.

(2017/01/14 - 30년전 오늘, 6월 민주항쟁의 불꽃이 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이근안, 파멸의 길

그는 고문행위로 박정희, 전두환의 군사독재정권이 힘이 쎄었을 때는 '기술자', '능력자'로 칭송받았지만 .

1988년 2월, 전두환의 제5공화국이 무너지고 수감되어 있었던 수많은 민주주의 운동가들 등이 석방되고 나서는 사정이 달라졌다.

그에게 고문당하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그의 행각에 대해 증언하였고, 이근안은 결국 스스로 경찰복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곤 10년 10개월. 약 11년의 시간을 , 공개수배를 피해 숨어서 살았다. 공소시효가 끝나길 기다리면서.

                                    (사진출처-헤럴드경제)

 

전두환정권 때는 고발을 당해도 정부가 우릴 지켜줄거니까! 하고 당당했던 그가, 도망을 간 것이다..

 

10년을 어떻게 숨어살어..? 직장도 없는데 뭘 먹고살지..? 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뒷바라지해주는 사람이 있었던 것.

그는 바로 .... 박처원. (지긋지긋하다)

 

#박처원, 내 사전에 처벌은 없다

박처원은 자신의 분신 이근안을 도피시기고 자신은 법원에 가 재판을 받게 되는데 재판결과는,, 구속도 아닌 집행유예였다^^

그리고 도피중인 이근안에게 몰래 돈을 건네며 뒤에서 지원했다.

이후에 그는 또 범인도피혐의로 기소되나, 고령과 당뇨병을 이유로 또! 집행유예를 받는다.

수많은 죄없는 사람들을 가두고, 고문을 지시하여 거짓진술을 받아내어 자기 업적만 쌓았던 박처원.

자신이 떠받는 전두환정권이 무너지고나서도 정신 못차리고 고문경찰들의 도피를 도운 박처원.

자신이 자행한 고문행위에 대해선 한마디의 사과도 없었던 박처원.

그는 결국 단 한번의 처벌도 받지 않은 채 세상을 떠났다. 늙어서.

 

#이근안, 징역 7년: 신앙생활 시작

이근안에게 무슨생각이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결국 자수를 하고

(김성학 고문사건으로, 이근안의 공소시효가 2013년으로 연장된 것이 한몫 한 것으로 보인다.

공소시효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숨어살다가^^ 언제까지 숨어살 순 없어, 뭐 이런생각이었을까?)

 징역7년을 선고받고 여주교도소에서 수감생활을 시작했다.

수감생활동안 그는 신학공부를 시작하며, 모범수로 지목될 정도로 조용한 생활을 했다고.

 

#출소 후, 목사의 길.

출소 후, 그는 신학대학원에 진학하였고.. 개신교 전도사 시절을 거치고 2008년 정식으로 목사가 되었다.

 

그는 이렇게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을 고문하며 죄를 뒤집어씌우고, 평생 잊을 수 없는 정신적, 신체적 트라우마를 남겼으면서, 7년만에 자유의 몸이 되어 목사라는 얼굴으로 떳떳이 고개를 들고 다니며 교인들에게 설교를 하고다녔다.

 

#나는 애국자다.

죗값을 치르고 정말 죄를 뉘우치고 반성했으면, 새로운 삶을 사는 것 - 누구도 비난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이근안은....

자신을 ^애국자^라고 생각하신다.

80대 노인이 된 지금까지.

 

이근안은 2010년 1월,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 있다.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며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상황에서는 그게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일이 아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기술자'가 맞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또, 2012년 나온 이근안이 쓴 자서전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고백'의 출판기념회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지난날을 회개하지만 당시엔 애국으로 한 일이다. 세월이 지나고 정치형태가 바뀌니 역적이 됐다. 이 멍에를 내가 고스란히 지고가고 있다."

 

 

자신의 잘못을 애국이라고 믿는 사람.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제일 무서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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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지나간 과거는 그만 잊고,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나아가자고 한다. 과거에 매달려봤자 시간적, 정신적, 물적 낭비라면서.

친일파 매국노들, 독재자들, 이근안같은 반인륜적 행위를 저지른 사람들을 보고선 당시 시대가 낳았던 어려운 상황에서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행동할수 밖에 없었다며 용서하자고, 그래도 그들 덕분에 이 정도 먹고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다고들 한다.

친일을 했더라도, 독재를 하며 국민들을 탄압했더라도, 고문을 했더라도 그들은 나라를 위해 헌신한, 시대적 상황에서의 애국자라고 한다.

..

절대 그렇지 않다.

그런 논리라면 모든 종류의 폭력은 합리화되어 미화될 수 있다.

최소한 국가라면, 지키고 보호하여야 할 자국민들을 짓밟아선 안 된다.

 국가라면, 결과보단 과정을 우선시해야 한다. 결과를 향한 과정에서 국민이 다치지 않게 하기 위해.

 

애국이라는 이름 하에 국민을 죽이고, 고문하고, 짓밟는 행위는 결코 정당화될 수 없을 뿐더러 용서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

 

이근안.

본인이 '목사놀이'를 해봐서 잘 아실 테지만 , 죽으면 끝이 아니다.

지옥에서 평생을 고문받으며 고통 속에 몸부림치며 살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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