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달이 지나니, 잊지 않고 찾아온 생리. 15년동안 매 달..
참, 익숙해질 법도 한데, 자궁이 아려오는 이 아픔은 익숙해질 수가 없는 것 같다.
이 반갑지 않은 손님으로 인해- 오랜만에 퇴근 후, 운동을 가는 대신 약을 먹고 한숨 푹 자고 일어났다.
일어나니 고요한 밤.
얼마 전, 황금연휴에 읽었던, 선명한 충격을 주었던 책. '살인자의 기억법'에 대한 독후감을 쓰기 좋은 시간이다.
이 책의 표지처럼 붉은, 그리고 긴 충격을 받아 그 자리에서 바로 독후감을 쓸 수가 없었다.
이제 준비가 된 것 같다.
줄거리.
30년간 꾸준히 살인을 해온 연쇄살인범이, 교통사고 때문에 받은 뇌수술을 계기로 살인 충동이 점점 사라지고, 25년 동안 살인을 하지 않는다. 자칭, 은퇴한 연쇄살인범.
살인을 그만두고 자신이 이전에 부모를 죽여버려 고아가 된 딸 '은희'를 입양해(은희에겐 그렇게 말했다.) 키우면서 남들과 같은 평범한 삶을 살다 70세의 어느 날, 알츠하이머 판정을 받는다. 알츠하이머는 빠르게 진행되고 그는 점점 기억을 잃어간다, 현재에서 가장 가까운 기억부터.
그러던 어느날, 자신과 같은 연쇄살인마 냄새를 풍기는 박주태와 마주하게 되고- 그는 그가 자신의 딸 은희를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챈다. 본능적으로. 그리고 그놈으로부터 은희를 반드시 지켜내야겠다고- 그러려면 박주태를 죽여버리는 수밖에 없다고 그를 죽이기러 결심한다.
그러나 자신의 기억은- 하루가 다르게 빠르게 사라져가고 , 그는 필사적으로 - 잊어버리기 전에 모든 것을 메모하기 시작한다.
죽기 전 그의 유일한 계획은, 박주태를 살인하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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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책은 은퇴한 연쇄살인범이자 알츠하이머성 치매가 빠르게 진행중인 70세 주인공 김병수의 1인칭 시점으로 전개된다.
일반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살인범의 생각과 냉소적인 어투가 인상적이었다.
- 그리고 글이 진행됨에 따라 치매도 진행되며 그가 생각하고 기억할 수 있는 분량도 짧아져서 그런지, 기억을 잃기 전 빠르게 메모를 남긴듯한 문장들로 이어져(이 문장들 역시 띄엄띄엄 정렬되어 있다) 단숨에 읽혔다. 책도 두껍지 않은데다 빠르게 읽혀 2시간 정도만 몰입해서 읽으면 완독이 가능한 책, 그러나 마지막 장을 덮은 후 남는 충격과 후유증은 무지 컸다.
- 이 책에는 여느 연쇄살인범이 등장하는, 범죄공포스릴러 장르의 , 공포감, 긴장감을 부르는 자세하고 긴박한 묘사는 없다. 1인칭 시점에서의 주인공 김병수의 말투는 무덤덤하고 투박하다.
예를들어,
'그래서 나는 아직도 내가 알던 나인지를 알아보고 싶어졌다. .. 그래서 죽였다. 그런데 힘이 많이 들었다. 실망스러웠다.' (23p)
'살인이 가장 산뜻한 해결책일 때가 있다. 언제나는 아니다.' (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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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 자신의 욕구로 인해 죄없는 무고한 사람들의 목숨을 앗으며 자신이 오래전 구매한 대나무숲에 묻어버리며, 그 대나무들이 쑥쑥 자라는 것을 평온하게 바라보던 연쇄살인범이었다. 25년간 살인을 끊기는 했지만, 그는 자신이 살인을 저지르며 일어났던 모든 장면들을 하나도 빠짐없이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나 죄책감은 전무했다. 그는 애초부터 다른사람이 느끼는 기쁨, 슬픔, 연민 따위의 감정은 느낄 수 없었으니까.
'내가 마지막으로 사람을 죽인 것은 벌써 25년 전, 아니 26년 전인가, 하여튼 그쯤의 일이다. 그때까지 나를 추동한 힘은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살인의 충동, 변태성욕 따위가 아니었다. 아쉬움이었다. 더 완벽한 쾌감이 가능하리라는 희망. 희생자를 묻을 때마다 나는 되뇌곤 했다. 다음엔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내가 살인을 멈춘 것은 바로 그 희망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7p)
그런 그가, 알츠하이머를 앓으며 죽기 전 간절하게 계획한 것 역시 살인. 그러나 다른게 있다면 이번엔 아무 이유 없이 죽이는 게 아닌, 타인을 지키기 위한 '필요'에 의한 살인이라는 것.
처음에는 수십명의 생명을 일말의 죄책감 하나 없이 앗아가버린 이 희대의 살인마에게 내려진 형벌이 고작,
겨우 기억을 잃는거라면 너무 세상은 불공평하지 않나, 하고 생각했다. 기억을 잃는다는건 자기가 저지른 그 끔찍한 일들도 , 자신의 피로 물든 그 과거들도, 모두 없어진다는 것이고, 감옥에 가더라도 그게 설령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었다.
그런데 그의 이야기를 듣고나니- 기억을 잃는다는 게 그에게 내릴 수 있는 신의 최고의 형벌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 중에 이런 말들이 나온다.
'기차 레일이 끊어지는데도 그걸 모르고 화물열차가 계속 달려온다고 생각해보세요. 어떻게 되겠습니까? 레일이 끊어진 지점에 기차와 화물이 계속 쌓이겠죠? 난장판이 되겠죠? 어르신 머릿속에서 진행되고 있는 일입니다.' (45p)
'기억을 상실하면 내가 누구인지를 알 수 없게 되고 미래 기억을 못하면 나는 영원히 현재에만 머무르게 된다. 과거와 미래가 없다면 현재는 무슨 의미일까. 하지만 어쩌랴. 레일이 끊기면 기차는 멈출수밖에.' (93p)
'치매에 걸린 인간은 벽이 좁혀지는 감옥에 갇힌 죄수다.' (98p)
기억을 모두 잃는다면 더는 인간이라 할 수 없다.현재는 과거와 미래를 연결하는 가상의 접점일 뿐, 그 자체로는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117p)
'나는 거대한 우주의 한 점에 고립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14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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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진정한 나일 수 있게 하는 것, 내 가족이 내 가족일 수 있는 것, 내가 아는 사람들이 내가 '아는'사람들일 수 있는 것은 모두 내가 가지고 있는 기억 덕분에 가능한 것일테다. 몇 번 인사만 했던, 왕래가 별로 없었던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기억에서 사라질 수 있다. 그런데 매일보고, 한평생을 알고 지낸 가족들, 죽마고우 친구들도- 기억 속에서 사라지면 처음보는 남이 되는 것. 내가 자라며 보고 느끼고 경험했던 기억자료들이 쌓여 지금의 내가 되는 건데 이게 사라지면 내가 나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치매가 무서운 것 같다. 우리 외할아버지도 돌아가시기 전에, 치매 증세를 보이셨다. 점점 증세가 심해져 나중엔 자식들도 알아보지 못하셔서, 떠나가시기 전까지 마음이 미어졌던 기억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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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변 사람들도 힘들겠지만, 이 책을 읽고 나니 기억을 잃은 그 사람 자신도 참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과거기억을 잊으면, 여태 내가 알고지내온 모든 것들과의 작별인사를 한다는 것이고 미래기억을 잊는다는 건, 나 자신을 영원히 잃어버린다는 것 이니까.
미래기억이 뭔가 싶었었는데. 나는 그저 '치매'는 과거기억들을 잊는 걸로만 생각하고 있었었는데. 미래를 기억할 수 없으면,
분명히 무엇을 하려고 어딜 갔는데 1분 뒤에 가면 무엇을 하려했는지 기억이 안나, 아무것도 할 수가 없는 것이다.
화장실에 오줌을 누러 갔는데 화장실을 가는 도중에 내가 무얼하러 갔는지 기억이 안나 아무것도 할 수 없게 되는 것. 사람이 다른 동물과 다른 게, 깊이있는 생각을 할 수 있고, 과거의 일들로부터 후회하고 느끼고 배우면서 좀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하며, 앞으로의 미래를 생각하며 계획하고 계획과 그 생각에 따라 자신의 본능을 컨트롤 할 수 있다는 것인데. 기억을 할 수가 없다면? 생각하고 계획을 세운 것은 무용지물이 된다. 어차피 곧 있으면 그 생각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리니까. 참 무섭다.
결국 존재하나, 존재하지 않는 것이 되고 마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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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중후반부로 흘러가면서 , 주인공의 기억상태는 더더욱 나빠진다. 이에 따라 자신이 키우던 개가 누구네 개인지, 아니 애초부터 그의 개였는지, 은희라는 존재는 그의 환상이었는지 (그의 부모님과 함께 같이 죽여버렸다고?) 그가 진짜일거라고 믿었던 그의 주변 세계가 무너져내린다. 그가 지키려고 발버둥치던 존재는 애초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 같으면서- 주인공 시점에 몰입하며 책을 읽는 독자들도 같이 의심하게 되고 혼란스러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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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 27살, 27년 동안 살아오며 쌓아온, 많진 않으나 두껍고 튼튼한 소중한 사람들과의 관계.
이 사람들은 분명, 내 인생에, 내 삶에 있어 가장 소중한 존재들이다. 그런데 이 사람들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었다면, 내 잘못되고 왜곡된 기억이 만들어낸 허구에 불과한다면 그걸 깨닫는 순간 나는 무너져내릴 것 같다.
이렇게, 올바른 기억이란 게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의도치 않게 혹은 의도치 않은 것 같지만 본인이 너무 원해서 기억을 왜곡한다. 그리고 그 왜곡된 기억은 왜곡된 신념이 된다. 이게 참 무서운 것이라고 다시금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왜 - 신은 인간을 기억을 왜곡할 수 있게, 그리고 늙어감에 따라 기억력은 약해지며 망각력은 강해지게 창조하였을까.
인간이 감히 신의 뜻을 이해할 순 없겠지만 . 궁금하다.
기억에 남는 구절.
'사람들은 악을 이해하고 싶어한다. 부질없는 바람, 악은 무지개 같은 것이다. 다가간 만큼 저만치 물러나 있다. 이해할 수 없으니 악이지. 중세 유럽에선 후배위, 동성애도 죄악 아니었나.' (11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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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을 영화로도 제작하고 있는 줄 모르고 읽었었는데, 개봉을 앞두고 있다고 한다.
책을 읽으며 주인공이 그려내는 이야기의 장면장면을 상상해서 내겐 이미 이 책 이야기가 이미지화되어 있다.
궁금하다, 영화로 보면 어떨지. 좋아하는 배우, 설경구씨가 살인자 김병수씨 역을 맡는다니,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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